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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8 20:51 수정 : 2019.08.18 19:55

2016년 그린 대작 <하늘길> 앞에서 포즈를 취한 황영자 작가. 자기 몸이 잘린 제 머리를 들고 가는 모습을 담은 이 그림에 대해 작가는 세상의 잣대를 벗어나 내키는 대로 내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이승을 떠나는 날 내 얼굴을 잘라 하느님께 바치러 간다는 상상의 도상으로 표현됐다고 했다.

원로작가 황영자 첫 대형전시
곡절 많은 삶·내면 세계 담은
강렬하고 독특한 자화상 많아
‘프리다 칼로’ 도상도 연상시켜

2016년 그린 대작 <하늘길> 앞에서 포즈를 취한 황영자 작가. 자기 몸이 잘린 제 머리를 들고 가는 모습을 담은 이 그림에 대해 작가는 세상의 잣대를 벗어나 내키는 대로 내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이승을 떠나는 날 내 얼굴을 잘라 하느님께 바치러 간다는 상상의 도상으로 표현됐다고 했다.
전남 목포가 고향인 원로작가 황영자(78)씨는 조선 왕실 외척가의 며느리였다. 1970년대 초 시집가서 엄한 명문가 금도에 맞춰 숨죽이며 살았다. 시아버지 김을한(1906~1992)은 <서울신문> 도쿄특파원을 지낸 언론인. 일본에 끌려갔던 고종의 혈육 영친왕·덕혜옹주의 귀국을 도왔다. 김을한의 동생 김장한은 어린 옹주가 일본에 가기 전 약혼하려 했다가 일제의 방해로 무산된 곡절을 겪은 인물이다. 시어머니는 명성황후의 민씨 집안 사람으로 덕혜옹주의 유치원 친구였다. 이렇듯 왕실과 쟁쟁한 인연을 맺은집안에서 작가는 아침저녁으로 시부모께 절하며 문안 인사를 드렸고, 은수저를 갖춰 하루 일곱끼의 참과 식사를 지어 올렸다. 크고 작은 집안일 또한 일일이 떠맡았다.

애초 품었던 꿈과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자유혼을 지닌 화가를 갈망했다. 평양사범을 나와 지리산 자락 구례의 학교에서 미술교사를 했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미대에도 진학했던 터였다. 결혼 뒤엔 꿈을 누르고 20여년 가사에만 전념해야 했다. 하지만 유년기 이래 가슴 속에 꿈틀거렸던 예술가의 끼는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강하게 되살아났다. 중년이 된 어느날 아이들을 데리고 간 교회 주일학교에서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재능)를 꼭 생전에 다 쓰고 가야 한다”는 설교를 들었다. 마흔 지난 나이였지만, 망설이지 않고 작업실을 차렸다. “네 인생의 주인공은 너 자신”“사물을 거꾸로 보는 것을 습관 삼으라” 는 부친의 말씀도 지침이 되었다. 자신의 욕망과 생각을 담은 자화상 같은 그림들을 그리고 또 그렸다. 그렇게 다시 30여년이 흘렀다.

지난 6월말부터 청주시립미술관에 마련된 김주영 작가와의 2인전 ‘놓아라’의 일부인 황 작가의 전시회는 볼거리, 이야깃거리가 넘치는 무대와도 같다. 곡절 많은 작가의 삶과 마음 내키는 대로 붓질을 하며 표현해온 내면의 색감과 형상이 어울려 진중한 울림을 낳는다. 지난 20여년간 여러 차례 단체전과 소규모 개인전으로 화력을 간간이 표출해왔던 작가는 이번에 처음 대형 초대전을 열고, 200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초현실적 상상력과 환각의 세계를 담아 표현한 자화상 스타일의 작업을 펼쳐놓았다.

3층의 전시장 들머리엔 <동키호테> 연작이 걸려 있다. 베레모에 요란한 무늬의 털옷과 꽃무늬 치마, 짝이 다른 부츠를 신고 남성을 상징하는 검은 펭귄들을 호위무사처럼 거느린 작품은 필력의 내공을 직감하게 된다. 빨간 드레스 차림으로 불교의 천수관음상처럼 여러 개의 손에 남자, 하이힐, 붓 등을 쥔 모습을 그린 <내 안에 여럿이 산다>, 세상을 떠나는 날 작가가 자신의 얼굴을 잘라 하느님께 바치러 간다는 괴기적 심상을 표현한 <하늘길>, 친구와 극장에서 고기를 뜯고 피주스를 마시며 영화를 보는 상상을 그려낸 <아바타> 등의 작품이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전시장 안쪽 공간에서는 여성으로서 느낀 성적 희열을 자궁과 남녀 군상이 얽힌 소파의 상징적 이미지로 표현한 석 점의 내밀한 연작도 나왔다.

지난달 30일 가슴에 새 문신을 한 채 블라우스, 청바지 차림에 푸른 하이힐을 신고 전시장에 온 작가는 거침없이 말했다. “저는 동년배 친구도 없고 가족과도 교류를 별로 하지 않아요. 그림 속이 내 집입니다. 그 안에서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이루고 싶은 것들, 기분, 생각들을 그려요. 어린 자식들을 병으로 잃고 우울증에 눈물짓던 어머니, 젊을 적 명문가 시부모를 봉양하면서 겪었던 차별과 울분 등을 떠올리면서도, 항상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그림이 모든 것을 싸안아줬어요. 작업실 갈 때는 그래서 항상 예쁘게 잘 차려입고 즐겁게 몰입할 준비를 하고 가지요.”

2008년 작 <자화상> 아래 선 황영자 작가.
출품작들의 주인공은 대부분이 자화상에 가까운 여성들이다. 남성들은 인형이나 검은 펭귄처럼 관념 속을 떠도는 존재로만 나타난다. 작가의 주체성을 강조하면서도 불안과 공포, 욕구 등을 강렬한 색채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멕시코 여성주의 거장 프리다 칼로의 도상도 연상케 한다. 올해 그린 <매직 카페트> 연작에서는 특유의 구도를 틀어 아이들 그림처럼 동화적인 세계의 상상력을 가미한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알라딘의 요술카페트를 떠올리며 그렸다는 신작들인데, 체스 말판의 격자 무늬 드레스를 배경으로 록가수 프레디머큐리와 소녀, 고양이 등 여러 얼굴 캐릭터들이 함께 등장하면서 다층적으로 변화해온 작가의 의식세계를 흥미롭게 드러냈다. 여성주의를 표방한 것은 아니지만, 여성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인물과 사물의 개성적인 도상, 색조를 통해 설득력 있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황 작가의 성취를 본격적으로 화단에 알리는 계기가 될 만하다.

미술관 2층으로 내려가면 평생 노마디즘(유목주의)을 화두로 물성을 내뿜는 사물 오브제 작업을 벌여온 김주영(71)작가의 작업들을 만나게 된다.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한 작가는 ‘떠남과 머묾’을 주제로 농가에서 수집한 잔재와 폐기물, 옛 방앗간의 부품 등을 엮어 유랑과 방황의 흔적들을 독특한 구도로 보여주고 있다. 9월15일까지. (043)201-2650. 청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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