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06 23:59
수정 : 2019.08.07 01:02
|
상트 페테르부르크 발레 씨어터 <백조의 호수>의 한 장면. 마스트엔터테인먼트 제공
|
근육 하나하나가 연기하는 백조의 몸짓
수석무용수 이리나 콜레스니코바
초절정 기교로 타이베이 무대 홀려
1200석 매진·4차례 커튼콜 ‘열광’
28일~9월1일 세종문화회관서
‘가성비’ 뛰어난 첫 내한공연
|
상트 페테르부르크 발레 씨어터 <백조의 호수>의 한 장면. 마스트엔터테인먼트 제공
|
순백의 튀튀를 입고 날개를 파닥이듯 가녀린 팔을 휘젓는 백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암흑처럼 어두운 호숫가에 조명이 꽂히자 24명 무용수의 하얗고 긴 팔다리가 더 도드라졌다. 상체를 앞으로 굽혀 몸을 둥글게 말아 올리고 물질을 하듯 발끝으로 선 채 다리를 들어 올리는 무용수들은 백조 그 자체였다. 잠시 후 주인공 오데트(이리나 콜레스니코바)가 등장했다. 유난히 길고 여린 목선과 쇄골, 어깨라인, 그리고 뒷 날개뼈까지 모든 근육을 이용해 백조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이리나의 동작은 “근육 하나하나가 연기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실감케 했다.
지난 4일 저녁 대만 타이베이 시내에 있는 대만국립극장에서 열린 상트 페테르부르크 발레 씨어터(SPBT)의 <백조의 호수>는 러시아 정통 발레의 우아함과 고고함에 투어 전문 발레단 특유의 화려한 무대와 강약 조절이 잘 어우러진 공연이었다. 오는 28일~9월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펼쳐질 첫 내한 공연 전에 미리 맛 본 SPBT의 기량은 기대감을 한껏 높였다.
|
상트 페테르부르크 발레 씨어터 <백조의 호수>의 한 장면. 마스트엔터테인먼트 제공
|
<백조의 호수>는 ‘발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다. 차이콥스키의 애절한 선율에 맞춰 지크프리트 왕자와 오데트(백조)가 펼치는 그랑 파드되(2인무), 호숫가 백조들이 풍기는 몽환적인 분위기와 초현실적인 이야기는 고전 낭만 발레의 정수를 보여준다. SPBT는 마린스키발레단의 유명한 발레리노였던 콘스탄틴 세르게예프(1910~1992)가 재안무한 판본을 공연한다. 왕자가 악마 로트바르트의 날개를 찢어 물리치고 백조들의 저주가 풀리면서 해피엔딩을 맞는 결말이다. 한국 공연에서는 SPBT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연주도 함께할 예정이다. 발레 팬이라면, 같은 기간 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르는 국립발레단 <백조의 호수>와 비교해서 보는 재미도 쏠쏠하겠다.
SPBT 공연의 최대 장점은 ‘가성비’다. 해외 발레단 내한 공연이 대부분 20만원을 넘는 것과 달리 SPBT의 공연은 5만(A석)~12만원(VIP석)의 합리적인 가격에 최고 수준의 퍼포먼스를 관람할 수 있는 기회다. 이는 1994년 창단 때부터 ‘발레 대중화’에 방점을 찍은 SPBT의 목표 때문이다. SPBT는 전 세계 주요 클래식 발레단 중 유일하게 국가 보조금이나 민간 후원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으로 운영된다. 설립자인 콘스탄틴 타치킨은 “발레 마스터 등 발레단 운영 인원 등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인건비를 줄여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젊은 관객도 많이 관람할 수 있도록 가격정책을 세웠다”고 설명했다.
|
상트 페테르부르크 발레 씨어터 <백조의 호수>의 한 장면. 마스트엔터테인먼트 제공
|
그렇다고 공연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SPBT는 아시아·유럽·미국·호주 등에서 매년 최대 250회의 공연을 한다. 러시아 발레 명문인 바가노바 발레 아카데미를 졸업한 수석무용수 이리나 콜레스니코바는 러시아 아라베스크콩쿠르 2002에서 은메달, 프라하 국제발레콩쿠르에서 금메달을 수상했으며, 21살부터 SPBT 프리마 발레리나로 활동하는 등 지난 20년 동안 세계 정상급 기량을 선보여 왔다.
이날 대만 공연에서도 콜레스니코바는 빛났다. 오데트(백조)와 오딜(흑조)의 양면성을 교차해 가며 펼치는 입체적 연기는 객석을 압도했다. 170㎝가 넘는 큰 키와 긴 팔다리는 고아한 날갯짓을 그림처럼 섬세하게 표현했으며, 발끝까지 모든 근육을 이용해 뛰는 점프는 무대를 진공 상태인 듯 느껴지게 했다. 오데트가 왕자를 만나 마음을 열어가는 장면은 청초했고, 도도하고 에너지 넘치는 흑조로 표변할 땐 관능미를 내뿜었다. 특히 오딜(흑조)이 펼치는 고난도 ‘32회전 푸에테’(발끝으로 몸을 지탱하고 한 쪽 다리는 접었다 폈다 반복하며 회전)는 ‘발레의 교과서’ 같았다. 무엇보다 올해 만 39살로 발레리나로서는 ‘노장’에 속하는 그가 타이베이에서 나흘 동안 6회 공연을 소화하는 강행군을 이어가면서도 완벽한 춤을 선보였다는 점은 찬사를 자아냈다.
|
상트 페테르부르크 발레 씨어터 <백조의 호수>의 한 장면. 마스트엔터테인먼트 제공
|
군무의 경우, 러시아 발레의 대명사인 ‘정교한 칼군무’를 기대한 사람들에겐 다소 아쉬울 수 있겠다. 하지만 투어 공연 전문인 SPBT는 4명이 마치 한 몸인 듯 움직이는 ‘파 드 카르트’(4인무)와 우스꽝스럽지만 재기 넘치는 광대의 36회전 등 <백조의 호수>를 상징하는 시그니쳐 안무에 선별적으로 힘을 준 느낌이다. 화려한 무대도 돋보였다. 전형적인 클래식 스타일에 고급스러운 색감이 특히 눈길을 사로잡았다. 파티가 열리는 궁중신의 화려한 샹들리에, 은은한 조명과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돋우는 푸른 색감의 호수 풍경은 마치 한 편의 회화를 감상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화려하지만 과하지 않은 의상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날 1200석 대만 국립극장은 4층 발코니석까지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SPBT는 4번의 커튼콜에 모두 응답하며 팬 서비스를 이어갔다. 특히 공연 뒤 밤 늦은 시간, 콜레스니코바의 사인을 받기 위해 500m 넘게 줄을 선 관객들의 모습이 놀라웠다.
5일 저녁 타이베이 한 호텔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난 콜레스니코바는 <백조의 호수>에 앞서 이틀간 마린스키 발레단의 한국인 수석무용수 김기민과 함께 <라 바야데르>를 공연한 소감을 전했다. 그는 “기민과는 지난해 모스크바 갈라쇼와 런던 콜리세움 <백조의 호수>에 이어 이번에 대만에서 <라 바야데르>도 함께 했다. 기민은 우주적인 스타급 기량을 갖고 있고, 우리 둘은 감성의 주파수가 딱 맞는 좋은 파트너다. 함께 내한할 기회가 생기면 <라 바야데르>를 공연하자고 했다”고 전했다. 이어 “3천석 규모의 한국 무대에서 서려니 긴장된다고 했더니 기민이 ‘매일 두 번씩 한국산 홍삼을 챙겨 먹으라’고 조언했다”며 웃었다.
아직 은퇴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6살짜리 딸이 자랑스러워 하는 엄마이자 발레리나로 끝까지 춤을 추고 싶다는 이리나 콜레스니코바. “볼쇼이나 마린스키와 달리 투어 공연 전문 발레단에서 춤을 추다 보니 레퍼토리가 한정돼 있어 아쉬운 점도 있다”며 “올해 바가노바에서 지도자 자격증을 땄는데, 나중에 발레 마스터로서 새로운 안무와 작품으로 SPBT를 이끌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타이베이/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