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7.17 20:20
수정 : 2019.08.19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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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1전시실. 2000년대 이후 그의 후기 묘법 대작들이 내걸렸다. 전시는 연대순을 거꾸로 돌려 1층 들머리 1전시실은 1980년대 이후 2000년대 최근까지 근작을, 아래 지하 2전시실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구작을 주로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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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1전시실. 2000년대 이후 그의 후기 묘법 대작들이 내걸렸다. 전시는 연대순을 거꾸로 돌려 1층 들머리 1전시실은 1980년대 이후 2000년대 최근까지 근작을, 아래 지하 2전시실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구작을 주로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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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미술계의 단색화(모노크롬)란 것들은 어처구니없는 행위들이 되풀이되어 나온 결과물이랄까요.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내가 살펴본 한국 화단 작가들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태였어요. 크게 유행하던 앵포르멜 같은 추상이 한풀 꺾이고 팝아트 옵아트 같은 서구 미술흐름이 막 밀고 들어오는데, 뭘 해야 할지 막막해했지요. 처절하고 각박한 상황인데 뭔가 해야겠다. 그래서 긁고 뚫고 긋고를 되풀이하는 어처구니없는 ‘짓’들을 했고, 몇몇 작가들이 40년 이상 계속 벌여온 겁니다. 그게 대단한 거죠.”
한국과 일본의 현대미술 거장 이우환 작가는 단색화의 역사를 그렇게 정리했다. 지난 4월 말 중국 상하이에서 프랑스 거장 이브 클라인, 중국 작가 딩이와 시작한 3인 전시의 개막 축하연 자리에서였다. 그는 원로작가 박서보를 이런 ‘짓’의 태두로 지목했다. 1960년대 말부터 회칠한 화폭 위에 일정 간격을 두고 긋는 행위를 계속 되풀이하는 <묘법> 연작을 90살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지속해온 박서보를 두고 “그가 없었다면 70년대 한국 미술은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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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나온 박서보 작가의 1985년작 <묘법>연작중 일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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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작가의 1970년작 <유전질>. 50~60년대 초창기 앵포르멜 회화에서 70년대 <묘법>연작으로 가기까지 과도기 과정에서 돌출한 이질적 작품연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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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차려진 박서보 회고전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9월1일까지)는 이우환의 말을 곱씹게 하는 자리로 다가온다. 1956년 부패한 정부미술전(국전)에 반대 선언을 한 청년작가로 미술계에 들어선 그는 50년 이상을 서구·일본·한국의 미술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시류에 맞는 미술을 만들어내기 위해 품팔이 노동자처럼 뛰고 뛰었다. 이런 노력은 전시장을 뒤덮은 <묘법> 연작과 초창기의 앵포르멜 그림과 팝아트 성향의 <유전질> 작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등록상표라 할 수 있는 <묘법> 연작은 여러차례 바뀌는데 전시는 그런 변화상을 1층과 지하 2개 층에 걸쳐 보여준다. 작가의 주장에 따르면, 이 연작이 태동한 건 60년대 말이라고 한다. 그 시절 격자를 지운 화폭 위에 연필로 끄적거린 흔적에서 시작해 70년대엔 칠한 큰 화폭에 규칙적인 파동처럼 그어내려간 도상으로 변화했다가 80년대 이후엔 닥종이 화면을 밀어 화면의 질감과 선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바뀐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는 거대한 화면에 붉은색, 노란색 등의 다채색을 입히고 막대 같은 이미지들로 구성의 효과를 높인 미니멀 회화를 보여준다. 초기인 50년대의 구상 연작이나 음울한 화면 위에 추상적 이미지들이나 태운 가죽을 놓은 앵포르멜류의 매체 회화는 지하 전시장에서 볼 수 있다. 특히 60년대말~70년대초 팝아트풍의 인물군상과 오방색 같은 전통색감을 결합시킨 만든 <유전질>연작이나 1970년 일본 오사카 만국박람회에 전시됐다는 대형 군상설치 재현작품 <허의 공간>은 혼란스런 인상을 주기도 한다. 수행자의 그림이라고 작가가 강조해온 묘법 연작과 초창기 앵포르멜 연작 사이에서 팝아트와 개념미술 스타일의 작품이 돌출적으로 튀어나오면서 이질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까닭이다.
홍대 미대에 교수로 몸담으며 추상화단과 홍대 학맥의 중추에서 40년 이상 군림한 박서보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하는 의미라고는 하나, 전시 내용은 그동안 수많은 대형 메이저 갤러리 전시들에 나온 전형적인 콘텐츠를 반복하는 수준이다. 박서보는 1991년에 이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으며, 단체전·기획전까지 치면 60여차례나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 참가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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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1전시실에 내걸린 박서보 작가의 후기 묘법연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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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그닥 새롭지 않은 그의 전시를 국립현대미술관의 핵심 전시장인 서울관에서 벌이는 걸까. 단색조 회화가 국제적으로 인기를 모았기 때문일까. 이우환의 말처럼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한 맹목적인 몸짓의 의미를 강조하려는 것일까. 청년기의 실험적인 앵포르멜 작품이 60년대 말 발랄한 전통 오방색 포스터풍의 <유전질> 연작으로 바뀌었다가 수행하듯 그린다는 <묘법>으로 확 탈바꿈한 배경은 또 뭘까? 전시는 제대로 답하지 않는다. 판 박힌 설명과, 검증되지 않은 작가의 주장을 옮겨놓은 ‘한국 최초의 앵포르멜 작가’라는 수식, 한국 최초의 앵포르멜 그림(1957년작
)이란 주관적인 단정과 함께 <묘법> 세부를 디지털 화면으로 확대 감상하는 첨단 장치가 놓여 있을 뿐이다.
전시실 말단 아카이브실에도 넘기기 민망스러운 오류들이 점점이 박혀있다. 박서보가 주역으로 참여해 한국 단색조 회화의 기점이 됐다는 1975년 일본 도쿄화랑 ‘5인의 백색전’ 전시 브로슈어라고 설명한 항목이 단적으로 그렇다. 엉뚱하게도 그 위엔 브로슈어 대신 1980년 일본 다른 지방 미술관의 전시 작품운송 책임자 명단을 붙여놓았다. 1983년 박서보가 작고작가 박현기에게 보낸 편지라고 설명문을 달고 봉투와 편지 내용을 소개한 대목도, 정작 실물 내용을 보니 대만 미술전 출품작가로 선정됐음을 일방적으로 알리는 통고문서였다. 개막한지 두달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전시중’인 오류들이 쓴웃음을 머금게 한다. 도대체 이 진부하고 헐렁한 전시를 서울관에서 하게 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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