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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의 불탄 초상화가 이번 전시의 주요 출품작으로 나왔다. 왕실의 최고 예복인 면복을 입은 18살 때 용모다. 이 그림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수도 부산의 용두산 근처에 있던 국립보관소로 옮겨졌다가 1954년 화재로 얼굴을 포함한 절반가량이 소실되는 비극을 겪었다. 생전 세자가 자기 초상화를 보고 남긴 글이 그의 저서 <경헌집>에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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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 ‘왕세자 효명’ 특별전
화제로 불타버린 초상같이
21살에 요절한 순조의 아들
10대시절 쓴 고문 글씨첩부터
대리청정 3년 시정 기록집까지
‘문예정치’ 꿈꾼 청년 권력자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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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의 불탄 초상화가 이번 전시의 주요 출품작으로 나왔다. 왕실의 최고 예복인 면복을 입은 18살 때 용모다. 이 그림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수도 부산의 용두산 근처에 있던 국립보관소로 옮겨졌다가 1954년 화재로 얼굴을 포함한 절반가량이 소실되는 비극을 겪었다. 생전 세자가 자기 초상화를 보고 남긴 글이 그의 저서 <경헌집>에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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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전 불탄 효명세자 초상화의 얼굴 부분을 확대한 그림. 이마와 왼쪽 뺨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돼 원래 모습을 가늠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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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의 시집 <학석집>의 시 작품들 중 일부를 모아 한글로 풀어쓴 언해본이다. 정이 각별했던 누이동생들(복온 공주, 덕온 공주)을 위해 일부러 번역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부 불타 훼손됐으나, 세자의 시심과 한글 서체의 미감을 느껴볼 수 있는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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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선 효명세자가 11살 때 쓴 글씨도 볼 수 있다. 그가 사후 익종으로 추존된 뒤 펴낸 <익종대왕어필첩>에 실려 있다.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인자수’(仁者壽: 덕스러운 사람은 오래 산다), ‘지자락’(知者樂: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산다)의 구절을 아이다운 필치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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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가장 안쪽에서는 효명세자의 사후 그에게 후대 임금들이 바친 기념예물들이 들어찬 진열장을 만나게 된다. 1835년 효명세자를 익종 왕으로 추존할 당시의 금보와 옥책, 1899년 문조 황제로 추존할 당시 옥보와 옥책, 1866년 효명세자에게 존호를 올린 의식을 기록한 의궤 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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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후반부에는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으로 국정을 이끌 당시 직접 고안해 잔치 등에서 연출했던 던 궁중무용 ‘정재’의 실연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당시 잔치와 공연에 썼던 꽃꽂이병과 마노잔 등도 함께 진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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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의 시를 모아 엮은 <경헌시초>의 초고분 일부. 잘된 시문에 동그라미 표시를 하거나 일부 고쳐 적은 흔적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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