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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15 18:31 수정 : 2019.07.15 20:13

효명세자의 불탄 초상화가 이번 전시의 주요 출품작으로 나왔다. 왕실의 최고 예복인 면복을 입은 18살 때 용모다. 이 그림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수도 부산의 용두산 근처에 있던 국립보관소로 옮겨졌다가 1954년 화재로 얼굴을 포함한 절반가량이 소실되는 비극을 겪었다. 생전 세자가 자기 초상화를 보고 남긴 글이 그의 저서 <경헌집>에 전해져온다.

국립고궁박물관 ‘왕세자 효명’ 특별전

화제로 불타버린 초상같이
21살에 요절한 순조의 아들

10대시절 쓴 고문 글씨첩부터
대리청정 3년 시정 기록집까지
‘문예정치’ 꿈꾼 청년 권력자 재조명

효명세자의 불탄 초상화가 이번 전시의 주요 출품작으로 나왔다. 왕실의 최고 예복인 면복을 입은 18살 때 용모다. 이 그림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수도 부산의 용두산 근처에 있던 국립보관소로 옮겨졌다가 1954년 화재로 얼굴을 포함한 절반가량이 소실되는 비극을 겪었다. 생전 세자가 자기 초상화를 보고 남긴 글이 그의 저서 <경헌집>에 전해져온다.
이처럼 스산하고 섬뜩한 초상 영정은 달리 없을 것이다.

전시장에서 아버지와 아들, 부자의 영정이 마주본다. 두 초상 모두 반쪽 이상 타서 얼굴 부분이 사라졌다! 역사적 기념물이라고 추어올리기엔 유령처럼 처참하다. 타버린 화폭 얼룩 사이에 빨간 강사포 예복을 입은 인물은 19세기 초 조선의 23대 임금 순조(1790~1834)의 31세 초상이다. 아예 얼굴이 날아갔다.

푸른 색깔의 면복을 입고 관을 쓴 이는 아들 효명세자(1809~1830)의 18세 모습. 왼쪽 뺨과 이마만 남았다. 원래 세자의 상은 부친 순조의 명으로, 순조의 상은 아들 효명의 주도로 그려졌다. 그렇게 부자가 합작해 정성껏 그린 초상은 한국전쟁기인 1954년 임시수도 부산의 보존시설에 보관됐다가 화재로 타버리는 비극을 겪는다. 후대의 실화와 훼손의 흔적은 부자의 비극적인 정치인생을 되새김하게 해준 소품이 되었다.

65년전 불탄 효명세자 초상화의 얼굴 부분을 확대한 그림. 이마와 왼쪽 뺨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돼 원래 모습을 가늠할 길이 없다.
서울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이 지난달 말 시작한 특별전 ‘문예군주를 꿈꾼 왕세자, 효명'은 두 부자의 초상에서 느껴지는 침울한 기운이 전시장을 지배한다. 주인공인 효명세자 이영은 21살에 과로로 피를 토하며 숨진 조선 왕자다. 19세기 초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득세하던 나라에서 순조를 대신해 3년간 대리청정을 하며 사실상 왕 역할을 했지만 제왕의 권좌에는 앉지 못했다. 안동김씨 출신인 왕비 순원왕후와 외척들의 드센 기에 눌려 유약하게 살았던 아버지 순조는 세자를 아꼈다. 효명이 할아버지 정조처럼 왕실의 문예정치를 다시 일으킬 것이란 기대감도 컸다.

효명세자의 시집 <학석집>의 시 작품들 중 일부를 모아 한글로 풀어쓴 언해본이다. 정이 각별했던 누이동생들(복온 공주, 덕온 공주)을 위해 일부러 번역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부 불타 훼손됐으나, 세자의 시심과 한글 서체의 미감을 느껴볼 수 있는 문헌이다.
전시장엔 세자시강원(조선시대 왕세자의 교육 담당 관서)의 효명세자 맞춤용 특제 교과서와 효명이 10대 시절 비뚤비뚤하면서도 의기를 갖고 써내려간 <논어>의 ‘인자수’ ‘지자락’ 등의 고문 글씨첩 자료들이 나왔다. 세자가 국정에 진력했던 대리청정 문답과 시정 기록을 담은 <대청시일록>과 궁중의 왕실잔치까지 세자가 모두 연출하고 시나리오를 짰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여러 잔치그림과 <춘앵무> 등의 악보, 무용본 자료들도 선보인다. 특히 이번 전시는 현재 전해지는 궁중잔치 노래와 무용 악보의 절반 이상을 20대 초반의 세자가 모두 창작하고 연출까지 도맡았으며 정조를 능가하는 400여점의 시를 썼다는 사실을 일러주는데, 일반 관객에겐 놀라움으로 다가올 것이다. 눈에 확 들어오는 입체적인 자료들은 아니지만 눈 깊이 들여다보면 이런 가정을 해봄 직하다. 180년 전 정치·문예에 두루 밝았던 당대 청년 권력자가 10년, 아니 20~30년 더 살았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어찌 굴러갔을까. 외세 침탈로 얼룩진 19세기 말의 국정혼란과 일본에 병합된 20세기 초 경술국치가 그대로 이어졌을까. 미뤄졌을까. 아예 없었을까.

전시장에선 효명세자가 11살 때 쓴 글씨도 볼 수 있다. 그가 사후 익종으로 추존된 뒤 펴낸 <익종대왕어필첩>에 실려 있다.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인자수’(仁者壽: 덕스러운 사람은 오래 산다), ‘지자락’(知者樂: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산다)의 구절을 아이다운 필치로 썼다.
효명은 2016년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박보검의 연기로 기억된다. 드라마에서 세자 이영은 왕이 되어 용상 앞단에 앉으며 현실에 한발 더 다가가려는 몸짓을 보여줬다. 요절에 대한 아쉬움이 팩션으로 반영된 셈인데, 특별전은 드라마와 달리 냉엄한 역사적 사실을 유물로 보여준다. 역사 속 이영은 격무 중 졸지에 순직하고, 그의 죽음은 왕통의 단절은 물론, 조선왕조가 쇠망의 내리막길로 치닫는 서막이 된다. 부친 순조는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왕조의 스러짐을 직감했다. 그래서 울부짖으며 제문을 지었다. “아! 하늘이 너를 어찌 이리도 빨리 앗아간단 말이냐? 하늘나라 상제를 잘 섬길 거라 여긴 것인가, 장차 우리나라를 두들겨 망하게 하려고 그런 것인가?”(<조선왕조실록>)

전시장의 구성은 평면적이고 단순하다. 대부분 책과 현판 등 기록유물이 진열됐고, 영상물은 궁중잔치의 실연장면이나 동궐도에 나온 효명세자의 공간을 그래픽으로 재현하는 데 머물렀다. 낭만적 이미지에 비해 시각적 감흥이 그다지 크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훗날 대원군 개혁과 고종 개화 정책의 뿌리가 된 세자 대리청정 시대의 정치적 의미, 고종이 가장 흠모한 선왕이라는 위상, 세자의 유업을 고종대에 실현하려 한 왕비 신정왕후의 이야기 등이 소홀하게 다뤄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9월22일까지.

전시장 가장 안쪽에서는 효명세자의 사후 그에게 후대 임금들이 바친 기념예물들이 들어찬 진열장을 만나게 된다. 1835년 효명세자를 익종 왕으로 추존할 당시의 금보와 옥책, 1899년 문조 황제로 추존할 당시 옥보와 옥책, 1866년 효명세자에게 존호를 올린 의식을 기록한 의궤 등이 보인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전시 후반부에는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으로 국정을 이끌 당시 직접 고안해 잔치 등에서 연출했던 던 궁중무용 ‘정재’의 실연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당시 잔치와 공연에 썼던 꽃꽂이병과 마노잔 등도 함께 진열되었다.

효명세자의 시를 모아 엮은 <경헌시초>의 초고분 일부. 잘된 시문에 동그라미 표시를 하거나 일부 고쳐 적은 흔적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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