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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20 17:46 수정 : 2019.06.20 19:25

옛 조선총독부박물관 천정벽화 <비천상>의 상체 모습. 서구인의 용모를 한 건장한 여인이 새깃이 달린 화관을 쓰고 푸른빛 피리를 불고있는 모습이다.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경복궁 동궁전 뭉개고 지어진
조선물산공진회 미술관의 ‘비천상’
104년 전 일본 신예 미술가 2명이
고구려 벽화에 감동받아 공동 창작

옛 조선총독부박물관 천정벽화 <비천상>의 상체 모습. 서구인의 용모를 한 건장한 여인이 새깃이 달린 화관을 쓰고 푸른빛 피리를 불고있는 모습이다.
한일병합 직후인 1915년은 이 땅의 근대미술사에서 특기할 만한 시점이다. 그해 일본 청년 화가 2명이 조선의 경성(서울)을 찾아와 두 나라 미술사에 남을 논쟁적인 유화 대작을 그렸던 까닭이다.

당시 막 발견된 고구려 강서대묘 벽화의 비천상을 본뜬 그림. 길이가 9m 넘는 큰 화폭에 비천상 벽화를 창작한 것이었다. 배경은 푸른빛 하늘에 분홍빛 구름이 너울거리는 천상의 세계. 피리 부는 팔등신의 풍만한 천녀가 천의를 흩날리며 천상을 떠다녔다. 고구려 도상에, 서구의 인상파 고전주의 화풍이 녹아든 <비천>의 탄생이다. 어이없게도 벽화는 조선왕조의 법궁 경복궁 동궁전을 뭉개고 지어진 조선물산공진회 미술관의 중앙홀 천장화였다. 지엄한 왕궁에 근대 문명과 일본 제국의 치적을 과시하는 박람회장 부속시설 건물이 들어섰고, 장식재로 고구려 미술을 모델로 한 그림이 들어가는 아이러니가 벌어진 셈이다. 미술관은 박람회가 끝난 뒤 총독부박물관으로 바뀐다. 1996년 1월 김영삼 정부가 철거할 때까지 고대유산과 왕실공예유물의 요람 구실을 했다.

<비천>은 1996년 1월 문화재관리국이 경복궁 복원을 위해 박물관 건물을 철거할 당시 사라질 처지에 몰렸으나, 세 전문가의 노력으로 살아남았다. 미술사적 가치를 알아본 백찬규 문화재관리국 건축사무관과 보존 복원을 적극 주장한 이상수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장, 그리고 이탈리아 유학을 갓 마친 회화 수복 전문가 한경순 건국대 교수가 그들이었다. 대형 벽화를 떼어내어 보존하는 공법 자체가 당시 처음 시도되는 것이었고, 친일 유산이란 곱지 않은 시선을 무릅쓰고 근대미술의 태동기 역사를 증언하는 작품을 보존했다는 점에서 근대기 미술 유산 보존의 좋은 선례를 남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옛 조선총독부 박물관 중앙홀 천정에 있던 벽화 <비천상>의 전체모습. 길이 9.8m, 폭 6.35m에 이르는 대형 유화다. 1995년 박물관 철거공사 과정에서 떼어져 지난 20여년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해왔는데, 지난해와 올해 정밀조사 과정에서 일본 작가 안도 도이치로와 다나카 료의 공동작업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뒤 20여년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일체의 전시 없이 숨죽여온 <비천>이 최근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지난해 박물관이 작품에 대한 세부조사를 처음 벌여 보고서를 발간하면서 미궁에 빠져있었던 벽화의 창작자들이 처음 확인되었다. 근대미술사가 김영순 전 부산시립미술관이 일본 각지를 수소문하면서 조사한 끝에, 일본 도쿄미술학교 출신의 안도 도이치로(1883~1967)와 다나카 료(1984~1974)라는 작가가 청년 시절 직접 경성을 찾아와 고구려 벽화 도상을 스케치하면서 공동창작한 작품이란 사실을 찾아낸 것이다. 김씨는 안도의 유족이 갖고 있던 작가의 당시 비천상 스케치와 벽화의 최종 도안, 경성을 찾아와 작업했다는 기록이 담긴 스케치북, 편지 등도 확인했다. 이런 자료들을 통해 막 화단활동을 시작한 일본 신예 미술가들이 막 발굴된 강서대묘 벽화고분에 큰 감동을 받고 이를 모티브로 작품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천도는 원래 1915년 당시 경복궁에서 열린 일제의 조선물산공진회 박람회 전시관의 장식용으로 설계되었다. 당시 데라우치 총독의 조선 총독부는 미술관을 건립하면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발췌한 비천상을 서양화 기법으로 표현해 동서문화의 융합을 시도하고 일제 당국이 추구한 내선일체의 정신을 표상하려는 의도를 드러내려 했다. 김영순씨는 지난달 25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미술사연구회 학술대회에서 연구성과를 발표하면서 “당시 서구에 일본이 아시아의 문명 제국으로 자리를 굳혔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면서 식민지 조선에는 조선의 고유문물을 보호 앙양하는 문화적 통치의 시책을 과시하는 성격을 지녔다”며 “비천상의 제작을 통해 조선 미술은 모호한 동양화 장르, 동양의 미술로 흡수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분석했다.

비천상의 작가로 밝혀진 안도 도이치로가 1915년 5월2일 그린 비천상의 초안그림. 미술사가 김영순씨가 일본의 유족을 통해 찾아낸 것이다. 그림에는 <조선경성미술관천정화를 위한 소묘>란 제목이 붙어있다.
<비천>은 한국인의 시각에서는 불편하고 마뜩잖은 느낌을 주는 미술 유산일 것이다. 하지만, 김영순씨의 지적처럼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미술관 전시가 이 땅에서 처음으로 고대부터 근대까지 미술유산을 한데 모은 계기가 됐고, 이를 통해 동양화 서양화 조각의 장르 개념이 처음 제시되었다는 점도 뚜렷한 역사다. 이를 단적으로 표상하는 <비천>은 대중 앞에 전시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한-일 관계가 최악이지만, 한일 미술 교류사의 곡절이 깃든 <비천>을 올해 광복절 즈음해서 과감하게 공개 전시할 수는 없을까. 역설적으로 그런 흑역사를 좀더 거리를 갖고 바라볼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상념을 떠올리게 할 만큼 <비천>은 고대 고구려 미술의 광범위한 영향력, 근대기 일본의 문화통치전략이 함께 녹아있는 미술 교류사의 복잡다단한 일면을 보여준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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