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6.19 17:02
수정 : 2019.06.19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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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 정종여가 1938년 근대적 화풍으로 그린 진주 의곡사의 <괘불도>. 세로 길이만 6m를 넘는 대형불화로 전통불화의 격식을 대부분 벗어난 파격 화법으로 그렸다. 절을 처음 벗어나 ‘절필시대’ 전이 열리고 있는 덕수궁미술관 정면 로비홀 공간에 내걸려 관객을 맞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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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요절·생활고로 활동 멈춘
정종여·정찬영 등 작가 6인 작품
덕수궁미술관 ‘절필시대’로 한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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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 정종여가 1938년 근대적 화풍으로 그린 진주 의곡사의 <괘불도>. 세로 길이만 6m를 넘는 대형불화로 전통불화의 격식을 대부분 벗어난 파격 화법으로 그렸다. 절을 처음 벗어나 ‘절필시대’ 전이 열리고 있는 덕수궁미술관 정면 로비홀 공간에 내걸려 관객을 맞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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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m가 넘는 종이 화폭 위로 먹빛을 머금은 구름바다가 일렁거리며 뻗어간다. 아득한 깊이를 지닌 구름들은 절묘한 번짐으로 지리산 봉우리의 거뭇한 표면을 뒤덮고 있다. 신비로운 환상의 경치와 사실적인 현실 경치의 두 요소를 모두 머금은 대작 <지리산 조운도>다. 그린 이는 경남 거창 출신의 월북화가인 청계 정종여(1914~1984). 국내 미술계와 화랑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근대 전통회화의 계승자로 첫손 꼽히곤 하는 실력파 작가다. 북한으로 간 뒤에는 이른바 북의 조선화 장르를 창안해 정착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지리산 조운도>는 1948년 청계가 지리산 봉우리들을 발품들여 답사해 현장 사생한 스케치를 바탕으로 그려졌다. 근대 리얼리즘의 현실적 관찰에 철저히 바탕해 화면을 구축한 실경산수화였던 셈이다. 금강산 같은 명산들을 숱하게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눈과 마음에 넣어둔 풍경을 기억에서 꺼내어 그린 소전 변관식이나 원만하고 차분한 우리 산야의 보편적 이미지들을 전형화시켜 그린 청전 이상범과는 구도나 시선, 붓을 부리는 필법이 전혀 다르다. 이 작품은 청계가 현실의 풍경과 움직임을 주시해 실경 속에 집어넣는 새로운 리얼리즘 수묵회화의 경지를 이미 30대 때 구축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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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 정종여의 1948년작 <지리산 조운도>(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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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조운도>를 비롯해 청계의 걸작을 만날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지난달 30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근대미술가의 재발견1:절필시대’전이다. 여기엔 1938년 근대적 화풍으로 그린 진주 의곡사의 <괘불도>도 나왔다. 절을 처음 벗어나 미술관 로비홀 공간에 내걸렸다. 세로 길이만 6m를 넘는 대형불화는 부처의 신체적 특징을 규정한 전통불화의 격식을 벗어나 인간적 용모와 물감의 색조·필선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근대 채색 화법으로 그렸다. 잔칫날이나 길거리 촌로의 모습, 세밀하게 관찰한 솔숲 정경 등 눈앞에 펼쳐진 실제 풍경을 철저하게 사생해 화폭에 옮기려 한 그의 스케치 드로잉 다수와 청년시절 의탁하며 공부한 해인사 풍경을 담은 병풍 그림 등은 잊혀진 월북작가의 내공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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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여성화가 정찬영이 1935년 그린 <소녀>의 연필 드로잉 초본.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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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는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출중한 기량으로 각광받다가 월북이나 요절, 생활고 등으로 잊혀졌던 국내 근대미술가 6명의 아카이브와 주요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선보이는 자리다. 청계 외에도 1930년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계속 입선특선을 거듭하며 발군의 능력을 보여줬으나 아이의 양육과 가사에 막혀 작가의 길을 접어야 했던 여성 채색화가 정찬영(1906-1988)의 <수련> <공작> 등의 작품들과 식물도감에 실린 세밀화 등이 눈길을 끈다. 인물화와 개성적 풍속화로 독특한 화풍을 구축했던 채색화가 백윤문(1906-1979), 1940년대 중국 도시에서 생활하며 인상파적 터치의 강렬한 현지 풍경을 그렸던 월북 화가 임군홍(1912-1979), 유영국·김환기 등과 추상미술운동을 초창기 벌인 작가 이규상(1918-1967), 국내 현대판화 현대도예의 기틀을 쌓은 선구자 정규(1923-1971)의 작품들과 아카이브 자료들도 재조명 받고 있다. 단연 뛰어난 화력과 폭넓은 작업 역량을 보여주는 청계의 작품들과, 필선이 여물고 사물에 대한 뛰어난 이미지 포착 능력을 보여주는 정찬영의 세밀화, 소녀 스케치를 주목할 하다. 하지만, 활동반경이나 작품, 아카이브 등이 큰 차이가 나는 여섯 작가를 뭉뚱그려 단체전처럼 묶은 것은 다소 안일한 기획이란 인상을 줄 소지가 있다. 청계는 작품의 분량이나 수준, 컬렉션 자료들의 역사적 의미로 볼 때 단독 전시를 했어야 온당한 거장이다. 게다가 그가 북한 화단의 주역으로 작고 때까지 활동했고, 다른 전시출품 작가들도 요절로 작업이 끝난 경우가 있는데도 ‘절필시대’란 제목을 쓴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9월15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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