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6.16 15:06
수정 : 2019.06.17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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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개관한 국립경주박물관 영남권 수장고 들머리 모습. 입구에 들어서면 전시 관람을 할 수 있도록 얼개가 짜인 토기와 기와, 벽돌류의 대형 진열장이 양옆으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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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모으는 수장고 전시]
국립경주박물관 영남권 수장고
문화재계 최초 전시개념 도입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 시초
전시 산책하듯 작품들과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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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개관한 국립경주박물관 영남권 수장고 들머리 모습. 입구에 들어서면 전시 관람을 할 수 있도록 얼개가 짜인 토기와 기와, 벽돌류의 대형 진열장이 양옆으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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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 ‘트루먼 쇼’가 펼쳐지는 건가?
박물관에 막 들어온 옛 유물 한 무더기가 지게차와 직원들의 손길을 타고서 수장고로 들락날락거린다. 그 광경이 관객의 눈앞 유리창 너머에서 바로 펼쳐진다. 현장 생중계로 비밀스러운 박물관 내부를 엿보는 듯한 기분이다. 연구원들이 분주히 오가는 벽면을 보니, 직원들과 유물 사이에 벌어지는 하루 일과를 요약한 대형 애니메이션 동영상이 계속 흘러간다. 대체 여기가 수장고인가, 영상관인가, 역사 전시장인가?
나라의 보물창고라는 선입관에 짓눌려 일반인들은 접근조차 생각지 못하는 곳, 국립박물관 수장고다. 문화재 동네에서 금단의 성역으로 꼽히는 이곳이 180도 탈바꿈하는 변신을 시작했다.
꽁꽁 숨겨왔던 기존 관행 버리고
보물과 직원들 사이에 벌어지는
비밀스러운 내부 모습까지 전시
“유물들 생생한 실체 직접 체험”
지난달 23일 경주시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 경내에서 문을 연 지상 2층, 지하 1층의 영남권 수장고는 유물을 만지고 관리하는 내부 모습 자체를 중계하듯 선보이는 얼개를 만들어 관심을 끌고 있었다. 개장 소식을 듣고 지난달 30일 찾아갔다. 수장고는 박물관 본관에서 옥골교 다리를 건너면 나타난다. 전통 맞배지붕에 격자형 창틀을 정면에 두른 신축 건물. 권위적인 외양을 지닌 듯했지만, 들어가 보니 눈높이를 한껏 낮추고 내부를 솔직하게 드러낸 종합전시교육동 같은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현관에서 수장고 들머리로 들어가니 양옆으로는 신라의 토기와 기와들을 시대별로 나열한 거대한 진열장 두 개가 떡 버티고 서 있다. 서로 마주 보는 두 개의 진열장 안쪽으로 신라의 유명한 절 7곳과 중요 발굴유적들의 상설전시 수장고 진열장이 도열해 관객을 맞았다. 무엇보다 신라시대 고도 경주를 수놓았던 옛 절들의 역사가 거대한 수장고 입구의 대형 진열장에 드넓게 펼쳐졌다. 분황사, 사천왕사, 석장사, 감은사, 고선사 등 익히 알려진 절들이지만, 절터에서 나온 관련 유물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을 모두 공개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유물들도 상당수가 낯익지 않은 것들이다. 머리 잘린 불상, 모전탑으로 유명한 분황사 구역에는 처음 보는 낙타 같은 네발짐승의 토우가 있었다. 눈이 부리부리한 귀신 혹은 용무늬 기와들도 가득 들어찼다. 저 유명한 신장상 세 분의 녹색 유약 바른 부조벽전이 나온 절 사천왕사 구역 진열장도 눈에 들어온다. 눈여겨보지 않았던 신장상의 손과 얼굴 새김 파편들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천왕상이 새겨진 정교하고 화려한 금속사리기로 유명한 감포 감은사의 유물 진열장에서는 종 모양의 울림판인 청동동탁, 소담한 불상들을 처음 실견할 수 있었다. 문무왕의 호국 전설이 간직된 이 절의 살아 있는 역사를 생생한 유물로 만날 수 있는 셈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영남권 수장고는 박물관 역사상 처음 열린 전시장 개념으로 만들어졌다. 머리 공간은 신라 왕조의 역사를 물질로 보여주는 현장 전시실이나 마찬가지다. 전체 수장고 10개 가운데 하나를 상설 전시공간으로 열어놓았다. 사실 박물관은 미술관보다 훨씬 공간 운용에 폐쇄적이다. 수장고는 당연히 금단의 영역. 언급조차 꺼렸던 분위기를 고려하면 큰 변화다. 관객들이 수장고로 들어가 신라 명품 유물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연구자들도 도서관 도서 대출하듯 열람 신청을 해 수장고의 유물들을 박물관 열람실에서 간단하게 볼 수 있게 해놓았다. 현관에 유물의 보존과학 연구와 처리 과정을 설명한 전시영역을 설정한 것도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었다. 경주의 냇가에서 채집되는 철가루를 비롯한 각종 유물들의 재료에 대해 영상과 함께 상세히 설명해놓았을 뿐 아니라 2년 전 경주를 뒤흔든 대지진 당시 경주박물관의 폐회로티브이(CCTV) 영상을 틀면서 지진의 무서움을 생생하게 추체험할 수 있게 해놓았다. 수장고 관리를 맡은 이재열 연구관은 “수장고 입구 상설 전시공간과 열람실에서는 언제라도 편하게 신라 유물의 생생한 실체를 수장된 모습 그대로 체험할 수 있다. 학계는 물론 일반인, 학생들의 현장교육 공간으로 바꿔 활용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라고 했다.
수장고 전시 시대가 열리고 있다. 꽁꽁 숨겨진 보관창고에서 대중들이 엿보고 즐거워하는 전시관으로 가자는 구호 아래 미술관·박물관이 열린 수장고 전략을 세우는 것이 새로운 유행으로 자리잡고 있다. 열린 수장고가 새로운 대세로 등장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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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관 3층의 미술은행 수장고에서 아래쪽 2층 휴게실과 1층 열린 수장고를 본 모습. 미술은행 수장고도 투명 유리창으로 내부의 소장품들을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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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관 없어 선입관 없이 관람”
다른 박물관·미술관들도 도입 서둘러
그 서막을 연 것은 지난 연말 졸속 준비 논란 속에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다. 부실한 전시환경에도 개관을 강행했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고 전시장 주변의 환경 정비도 제대로 갈무리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소장 명품들을 생생하게 나열한 수장고 안을 둘러보면서 전시 산책을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시민들과 미술애호가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12월 말 개관한 이래 지금까지 반년이 지났는데 9만명을 훌쩍 넘는 관객이 청주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찾아왔고 이를 벤치마킹하려는 지자체들의 견학팀도 줄을 잇고 있다. 미술관 쪽은 ‘대성공’이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실제로 지난 9일 현장을 찾아보니 적지 않은 가족단위 시민들이 네 열로 진열장에 현대 조각과 설치작품들을 놓은 1층 전시장을 관람하고 있었다. 딸과 함께 전시장을 찾은 김경희(45)씨는 “유리 진열장에 갇혀 작품을 사방에서 보지 못하고 막힌 느낌을 줬던 기존 전시장의 한계를 벗어나 편하고 선입관 없이 작품을 보게 한다는 점이 좋다. 전시 방식이 신선해서 계속 찾을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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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16일부터 이달 2일까지 열린 서울시립미술관의 신소장품 기획전 ‘멀티-액세스 4913’의 전시장 모습. 수장고 내부 얼개를 그대로 전시장에 끌고 들어와 작품을 구입해 수장하는 전시장 이면의 양상을 관객에게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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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수장고, 전시형 수장고의 개념은 2003년 스위스의 건축가 듀오 헤어초크와 드뫼롱의 설계로 개관한 스위스 바젤의 샤울라거 미술관이 본격적인 원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리창을 통해 작품 입고와 수장 과정을 보여주고 수장고에도 전시된 상태로 작품을 보관하는 샤울라거 특유의 창의적인 운영 전략은 이후 서구 미술관은 물론 아시아 미술관에도 큰 영향을 주며 보는 수장고 붐을 불러왔는데, 그 바람이 청주관과 경주박물관 수장고 등을 통해 국내에서도 본격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셈이다. 영국 런던 테이트뮤지엄이나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라크마 뮤지엄 등 서구 미술관 상당수가 보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관객과 미술관이 교감할 수 있는 내밀한 수단으로 보는 수장고 개념을 적극 도입해 이런 얼개의 미술관 수장고가 확산되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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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낮 찾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1층의 열린 수장고. 관객들이 진열장에 열을 이뤄 놓인 조각품들을 감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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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흐름 앞에 보수적인 국립박물관도 열린 수장고를 적극 활용한 전시의 확장 전략을 내놓기에 이르렀고, 다른 공사립 박물관·미술관도 개방형 수장고 사업에 나설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경우 4~6월 열린 신소장품전에서 수장고 공간을 그대로 전시장에 들여와 작품들의 제원과 주요 내력을 적은 아카이브 자료와 함께 날것 그대로 내걸리거나 설치된 작품들을 내보여 신선하다는 반응을 얻었다. 백기영 학예연구부장은 “미술관의 수장고 자체를 일종의 기억저장소로 보고 수장고 입고 과정을 관객에게 상세한 아카이브와 함께 그대로 노출한다는 취지에 학예실 모두가 동감했다”고 했다. 제주도립미술관도 최근 공공수장고를 개관하면서 공간 일부를 수장고형 전시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는 중이다.
수장고 전시는 가려졌던 미술관 운영의 숨은 단면들과 실상을 관객에게 솔직히 드러내는 장점이 있다. 대중 친화적인 21세기 전시기관의 역할모델을 정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배경이다. 전문가들은 유물과 작품의 안전문제를 고려해 좀 더 정교하고 포괄적인 전시기법이 개발되어야 한다는 점을 과제로 지목하고 있기도 하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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