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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03 19:00 수정 : 2019.04.03 21:27

강병규 황간역 명예역장이 직접 만든 나뭇조각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고향처럼 편안한 느낌을 주기 위해 나무조각이 있는 흔들의자를 황간역 플랫폼에 설치했다고 한다. 강성만 선임기자

[짬] 영동 황간역 강병규 명예역장

강병규 황간역 명예역장이 직접 만든 나뭇조각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고향처럼 편안한 느낌을 주기 위해 나무조각이 있는 흔들의자를 황간역 플랫폼에 설치했다고 한다. 강성만 선임기자

강병규 황간역 명예역장은 지난해 말 정년퇴임했지만 여전히 역을 지키고 있다. 한국철도공사는 42년 철도원 생활을 마감하는 강 역장에게 명예역장 위촉장을 수여했다. 민간인이 아닌 철도원 출신으로는 처음이다.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역장과 역무원으로 일하며 황간역을 ‘문화가 있는 고향역’으로 가꾼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그는 오는 20일 황간역에서 열리는 71번째 공연과 전시(30일까지)를 앞두고 분주하다. 라오스 방갈로초등학교 급수시설 후원을 위한 이 자선 전시엔 신현수 시인의 사진 작품과 함께 그가 그린 작품 40여 점이 내걸린다. 시화전 그림은 그려봤지만 판매를 위한 그림전은 처음이란다. “11점이 이미 주인을 찾았어요. 완판이 목표입니다. 하하.” 지난 2일 충북 영동군 황간역 2층 황간마실 카페에서 강 역장을 만났다.

“지난 3월 9일 70번째 공연은 연극배우 남명옥씨와 소리꾼 도영실씨가 꾸민 <봄날 춘향> 소리마당이었어요. 황간역에서 초연하고 대전 소극장에서 다시 했는데 반응이 좋아 대전에서 정기 공연을 하기로 했답니다.”

경부선 한가운데 위치한 황간역은 2013년부터 시와 전시, 공연이 있는 문화공간으로 주목받았다. 그가 역장으로 오고 1년이 지난 뒤였다. 사연이 있다. “영동군 황간면은 제 처가가 있는 곳이에요. 우리 가족도 38년째 살고 있지요. 퇴임을 앞두고 작은 시골역을 예쁘게 가꾸려고 황간역장을 자청했는데 바로 적자 절감 차원에서 역을 없애기로 했다는 말이 들려오더군요. 그때 절박했어요. 역을 없앤 역장이 될까 봐 걱정되기도 했죠.”

주민들과 역을 살릴 방법을 고심하다 ‘문화가 있는 고향 역’을 떠올렸단다. “고향역이란 말은 있어도 고향 항구나 터미널, 공항은 없잖아요. 먼저 동네 분들이 모여 항아리에 고향에 관한 시나 그림을 그렸어요. 이렇게 만든 항아리 100여 개를 역 곳곳에 놓았죠. 시각적으로 고향을 느낄 수 있도록요. 음악회도 해보자고 해서 2013년 8월부터 시작했죠.” 그의 아내 등 주민 30여 명은 2013년 황간마실 협동조합을 만들어 역 창고를 개조한 공간을 임대해 문화 교육 프로그램을 꾸리고 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역 이용자가 늘면서 폐지 계획은 없던 일이 되었단다. “요즘 주말이면 평균 200명 정도는 찾는 것 같아요. 제가 공정여행 기획자 양성을 위한 강의를 한 게 인연이 돼 매년 경기 화성과 의왕 지역에선 가을에 500명씩 찾아옵니다. 식당을 하는 동네 분들이 제가 가면 ‘닭 삶겠다’고 고마워하시죠.” 그는 황간역을 알리기 위한 에스엔에스나 블로그 활동도 열심이다.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철도문화체험행사도 직접 한다. “저는 시골역 마당에 멍석을 까는 플랫폼 구실이죠.”

강병규 역장이 오는 20일 자선 그림전에 내놓은 작품. “이 그림엔 재미있는 사연이 있어요. 라오스 봉사단이 준비해 간 선물 꾸러미에는 과자봉지도 있었는데, 여동생과 함께 있던 이 사내아이가 과자봉지를 받자마자 혼자 먹으려고 뛰어가더랍니다. 오빠가 나눠주기를 기다리던 여동생은 그만 와 하고 울음을 터뜨렸고, 그 소리를 들은 오빠는 아차 하고 다시 되돌아와 이렇게 여동생을 감싸면서 달래더랍니다.”

강병규 역장이 방갈로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그린 그림.
코레일이 3년 전 만든 고향역장제도 그를 모델로 삼았단다. “고향 등 연고가 있는 지역의 시골역장 지원을 받아 성과를 내면 장기 복무를 하도록 했어요. 현재 24개 역이 고향역으로 지정되었어요.”

황간역을 문화플랫폼으로 가꾸는 일은 퇴임 뒤에도 변함이 없단다. “전시나 공연 기획도 하고 역 주변 환경을 가꾸는 일도 제 일이죠.”

지난해 말 정년퇴임 명예역장으로
‘7년간 문화가 있는 고향역 가꿔’
“고향 간이역 사라질까 절박해서”

시노래 중창단 ‘시동’ 단원으로 활동
라오스 초등교 급수시설 지원 위해
20일부터 황간역서 첫 자선 그림전

황간역 갤러리 전시 일정표.
그는 지금은 없어진 국립철도고를 나와 1976년부터 철도원으로 일했다. 역무원으로 10년, 승무원으로 6년가량 일했단다. 시골역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2012년 역장이 된 뒤 기관장 모임에 가서 역 이야기를 했더니 관심이 없어요. ‘기차 탄 지 몇 년 됐다’면서요. 1990년대 초 황간역 부역장을 할 때는 명절 표 부탁도 많이 받았죠. 역장 때는 부탁이 없더군요. 지금은 대체 교통수단이 많잖아요. 시골역 기능이 많이 줄었어요. 예전엔 무연탄 등 화물 수송도 했고 농민들이 지은 농작물을 소화물로도 많이 보냈죠.”

황간역 근무자는 현재 6명이다. 2명이 3교대로 일한단다. “영동군과 경북 상주시까지 7개 면이 역세권이죠. 전국적으로 역세권이 가장 넓은 역입니다.” 역엔 ‘서행하는’ 무궁화 열차가 선다. “버스를 타면 멀미를 하는 어르신들과 통근자들이 주로 이용합니다. 교통 약자들의 발이죠.”

철도는 산업혁명을 이끈 근대의 상징이다.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다. 15년 전 등장한 케이티엑스가 시민의 삶과 국토에 미친 영향을 떠올리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철도 하면 떠오르는 근원적 정서는 친근함이다. 시간이 머물러 있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 홈 대합실도 예전 모습 그대로 두었단다. “플랫폼에 난 풀도 뽑지 않았어요. 편한 고향 느낌을 주려고요.” 철도원 인생에 가장 보람을 느꼈던 장면을 묻는 말에 이런 답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휴일이나 명절 때 손주 마중을 나온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주가 기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입가가 올라가는 걸 볼 때 제 일이 이분들에게 기쁨을 주었다는 생각에 큰 보람을 느꼈죠.”

황간역의 상징인 시항아리. 강성만 선임기자

옛 간이역의 낭만이 살아있는 황간역 홈 대합실. 강성만 선임기자
그는 가수 박경하씨 등이 지난해 만든 시노래 중창단 ‘시동’의 단원이기도 하다. “시동에 함께 참여한 라오스 방갈로초등학교를 돕는 모임(이하 방갈모) 이미희 상임대표의 권유로 지난 1월 라오스 푸쿤주에 있는 방갈초교를 찾아 봉사활동을 했어요. 2년 전 결성된 방갈모는 현재 회원이 327명이죠. 동남아 지역을 대상으로 학교와 도서관 건립 등 봉사활동을 하고 있어요.”

전시회는 어떻게? “라오스에서 옥수수 등을 파는 나무로 만든 가판대 구조물이 인상적이었어요. 나무로 얼기설기 만들었더라고요. 시간이 지나면 환경 파괴 없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구조물이죠. 제가 그걸 그려 엽서로 팔면 어떨까 말을 꺼낸 게 계기가 돼 전시회까지 이어졌어요.”

계획을 물었더니 정해진 것은 없다면서 덧붙였다. “나이가 육십을 넘으니 ‘그림은 아마추어입니다’ ‘시는 잘 모릅니다’ 이런 말을 하기 쉽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면 ‘그동안 뭐했어. 좋아한다면 제대로 배우고 했어야지’, 이런 답이 돌아올 것 같아요. 지금껏 뭐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림도 그렇고 이제 배울 일만 남았어요.”

철도원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꼽는다면? “한 여름 새벽이었어요. 장항선 간치역이었을 겁니다. 화물열차 가장 뒤 차장 칸에서 차창 밖으로 역 신호등 불빛이 철로에 반사돼 흘러내리는 걸 봤어요. 그때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철도원 아니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생각을 했죠.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입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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