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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02 11:52 수정 : 2019.04.02 22:38

정규 10집 <이머전>을 발표한 세계적인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 허브뮤직 제공

세계적 음반사와 10집 ‘이머전’ 발매
즉흥적인 녹음 대신 조립하듯 작업

숨소리는 퍼커션처럼, 손에선 빗소리
실험적인 독특한 사운드 만들어내
자작곡 6곡…세계 돌고 12월 한국에

“시간 들여 상상했던 소리 구현
꾸준히 음악 할 수 있는 힘 얻어”

정규 10집 <이머전>을 발표한 세계적인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 허브뮤직 제공
재즈는 즉흥과 찰나의 음악이다. 공기처럼 흐르는 소리를 날것 그대로 담아내려면, 라이브를 하듯 한번에 주욱 녹음해야 한다. 나윤선도 그랬다. 사전연습 없이 단 한번에 녹음을 마친 적도 있다. 그랬던 그가 재즈 보컬을 한 지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찰나·순간의 음악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내가 상상하던 소리를 구현하는 음악, 건축을 하듯 뼈대를 세우고 집을 지어 올리는 음악이 하고 싶어졌어요.” 1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만난 나윤선이 말했다.

생각을 현실화할 조력자가 필요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프로듀서 클레망 뒤콜이 자청하고 나섰다. “스튜디오에서 그런 작업을 해본 건 처음이었어요. 갖은 소리를 넣었다 뺐다 이렇게 만졌다 저렇게 만졌다 하는 게 마치 부품을 조립하고 퍼즐을 맞추는 것 같았어요.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낮인지 밤인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해서 작업했죠.” 그 결과물이 2일 국내 발매된 정규 10집 <이머전>이다. 얼마나 몰입했으면 제목이 아예 ‘몰입’일까.

피아노, 기타, 퍼커션 등 어쿠스틱 악기 소리를 녹음한 뒤 장비를 이용해 조금씩 뒤틀었다. 독특한 사운드를 위해 악기를 색다르게 연주하기도 했다. 피아노 건반 여러 개를 테이프로 붙이고 주먹으로 내리치거나 첼로를 통기타처럼 안고 손가락으로 줄을 뜯어 연주하는 식이다. 사람 몸으로 낸 소리를 변형해 악기처럼 활용한 대목은 사전정보 없이는 눈치채기 힘들다. 첼리스트의 숨소리는 퍼커션 소리처럼(‘히어 투데이’), 손가락 튕기는 소리는 빗소리처럼(‘상 투아’) 들린다.

전세계를 누비며 활동하고 있는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이 발표한 정규 10집 <이머전> 표지. 허브뮤직 제공
수록곡 13곡 중 6곡이 자작곡이다. ‘인 마이 하트’에는 11세기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시인 루미의 시를 가사로 붙였고, ‘더 원더’ ‘히어 투데이’ ‘미스틱 리버’ ‘인빈서블’에는 다국적 여성 싱어송라이터 3명이 가사를 붙여줬다. ‘아임 올라이트’만 이번 앨범에서 유일하게 영어 가사까지 직접 썼다. “와인이 과했다/ 난 괜찮아/ 넘어졌다/ 난 괜찮아”로 시작해 “사랑이 과했다/ 상처가 컸다/ 그래도 난 괜찮아”로 끝나는,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1분45초짜리 노래에선 알코올 향이 난다.

나머지 7곡은 커버곡이다. 조지 해리슨의 ‘이즌트 잇 어 피티’를 가성으로 부르는 대목은 쓸쓸하기 그지없고, 프랑스 영화 사조 누벨바그를 이끈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영화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에 삽입된 ‘상 투아’를 부르는 목소리엔 비장미가 서려 있다. 이 곡을 만든 영화음악의 거장 미셸 르그랑은 지난 1월 타계했고, 가사를 쓴 아녜스 바르다도 지난 3월28일 숨을 거뒀다. “녹음한 걸 두 분께 꼭 들려드리고 싶었는데, 너무 안타까워요.”

마빈 게이의 ‘머시 머시 미’, 슈프림스의 ‘유 캔트 허리 러브’, 레너드 코언의 ‘할렐루야’, 조니 캐시 버전으로 유명한 미국 민요 ‘갓스 고나 컷 유 다운’은 팝도 재즈도 아닌, 장르가 ‘나윤선’인 곡들로 재탄생했다. 스페인 작곡가 이사크 알베니스의 클래식 기타 연주곡 ‘아스투리아스’를 신들린 스캣(목소리를 악기 삼아 즉흥연주를 하듯이 흥얼거리는 창법)으로 변주한 걸 들으면 유럽인들이 왜 열광하는지를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깨닫게 된다.

정규 10집 <이머전>을 발표한 세계적인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 허브뮤직 제공
주 활동무대인 유럽에선 3월 초 앨범이 먼저 발매됐다. “오늘날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재즈 싱어는 한국인이며, 그 이름은 나윤선이다”(프랑스 <레 제코>), “나윤선의 목소리는 한 마디로 기적이다”(독일 <슈피겔>) 등 언론의 극찬이 쏟아졌다. 지난해 세계 3대 메이저 음반사 중 하나인 워너뮤직과 계약한 뒤로 처음 낸 이번 앨범은 아시아, 미국 등 전 세계에 순차적으로 발매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유럽, 미주 등을 도는 월드투어를 내년 말까지 예정하고 있다. 올해 12월엔 서울, 인천, 울산 등을 도는 국내투어를 한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 들어도 늙지 않는 음악을 하는 이들을 보며 ‘이게 예술의 힘이구나’ 했거든요. 저도 이번 작업을 통해 ‘음악 한 지 20년 넘었는데 아직도 가슴 뛰는 음악을 만나는구나’ 깨닫고, 앞으로 꾸준히 음악 할 수 있는 힘을 얻었어요.”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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