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3.14 03:00
수정 : 2019.03.1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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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개인전 전시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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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없는 개발에 분노한 작가들
서울 도시재생 소재로 삼아 전시
박 시장에 대한 비판·조롱 보다
담담한 풍자·은유로 현실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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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개인전 전시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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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이 ‘60대 중견작가’로 전시장에 데뷔했다.
믿기지 않는다고? 요즘 서울 도심 재개발과 도시재생사업을 벌이느라 정신 없을 텐데 언제 예술을 하느냐고?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개발 논란의 핵심 지역인 서울 을지로 철거 대상구역의 한 건물에 그의 이름을 내건 개인전이 차려졌다. 박 시장의 육성과 그가 돌아본 재개발 현장 이미지 따위를 상상력으로 버무린 영상과 드로잉 등을 선보이고 있다.
8일부터 을지로 3가 143번지 조명상가 출입문 앞엔 ‘박원순 개인전 오픈을 축하합니다’란 제목을 단 화환이 놓였다. 박원순전은 이 상가 건물 4층의 대안전시공간 ‘상업화랑’에서 24일까지 열리고 있다. 화환을 보낸 이는 차지량, 오세린, 한정림 등 소장 미술작가 11명(8팀)이 꾸린 프로젝트그룹 ‘서울-사람’. 이들이 바로 전시를 꾸린 주역들이다. 묵은 것 몰아내기식의 도시개발 정책에 분노와 무력감을 느껴 모임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난 1월 5일 첫 회의를 열자마자 박 시장의 도시재생, 재개발사업의 현상들을 작품 소재로 삼아 그를 작가로 데뷔시키자고 의기투합했고,. 자신들은 도우미(어시스턴트)가 되기로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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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그룹 시엠와이케이(CMYK)가 옥탑방 작가가 된 박원순의 상상력을 떠올리며 기획한 겨울나기 이벤트 무대의 모습. 응모한 시민들을 추첨해 100명에게 옥탑방-겨울나기 종합세트를 선물하는 프로젝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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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안쪽에 최황 작가의 동영상 <사건지평선>이 흘러가고 오른쪽 벽면엔 오세린 작가가 터지고 시든 귤을 금속제로 뜨고 도금한 <귤쨈, 마그마>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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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의 재개발 추진위 사무실부터 4층 합판으로 전시 벽을 친 ‘상업화랑’으로 오르는 계단 길은 팍팍하고 헐렁하다. 벽에는 디자인공동체 ‘일상의 실천’이 만든 이색 프로젝트 작업인
연작 포스터가 다닥다닥 붙었다. 박원순 시장의 발언과 구두, 안경 같은 그의 물건들, 방문했던 장소 등을 디지털 화면에서 조합해 전혀 다른 맥락의 선동적 이미지로 출력한 포스터들이다.
전시장 들머리에 들어서자 작가 그룹 시엠와이케이(CMYK)가 ‘옥탑방 작가’가 된 박원순을 떠올리며 기획한 겨울나기 이벤트 무대가 펼쳐졌다. 전시장에서 만난 시민들을 상대로 매주 추첨을 벌여 뽑힌 100명에게 난로와 털신, 곰 인형 등의 옥탑방-겨울나기 종합세트를 선물하는 프로젝트다. 지난해 여름 정릉 달동네에서 옥탑방 생활을 체험한 데 이어, 금천구에서 겨울 옥탑방 생활을 다시 체험하려다 연기한 박 시장을 떠올리며 꾸린 생활난장이라고 했다. 오세린 작가는 시들거나 깨어진 귤들을 본떠 금속제 조형물을 만들어 도금한 자신의 <귤쨈, 마그마> 연작을 지켜보면서 말했다. “지금 을지로 재개발 철거에서 보이듯 박 시장의 방식은 뒤처지는 것을 밀어낸다는 것이죠. 저도 성장하면서 얼마나 많은 이를 밀어냈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소외된 을지로 상가를 보면서 깨어진 귤, 싸게 파는 귤에서 버려진 것에 대한 관심을 떠올리며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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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상업화랑으로 올라가는 3층 계단 옆벽에 붙인 연작의 일부. 디자인공동체 ‘일상의 실천’이 만든 이색 프로젝트 작업의 결과물이다. 박원순 시장의 발언과 방문 장소 등을 디지털 화면에 제시하고 관객이 이를 취향대로 조합해 전혀 다른 선동적 포스터를 스스로 만드는 얼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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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황 작가는 훨씬 냉혹한 눈길로 박 시장과 도심 재개발을 바라본다. 그의 파노라마 이미지 영상작업인 <사건지평선>은 포털 지도 서비스에 ‘거리뷰’로 나온 을지로, 대림상가, 청계천로의 지난 8~9년간 풍경을 모아 다큐 영상으로 구성했다. 거리뷰 영상에선 절대로 골목 안쪽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안쪽을 보려면 직접 들어가 볼 수밖에 없다. 이런 거리뷰의 특징을, 우주 블랙홀 안쪽의 사정을 전혀 알 수 없는 사건지평선 개념으로 풀었다. 정용택 작가는 ‘작가 박원순’의 육성에다 을지로 청계천의 재개발을 촬영한 영상을 충돌시키면서 작가의 진정성과 모순된 정책을 미묘하게 포갰다.
‘상업화랑’에 펼쳐놓은 작가들 메시지는 단순하지 않다. 박 시장에 대한 직설적 비판과 조롱보다는, 철거 바람을 앞둔 을지로 상가의 현실과 시장논리가 지배하는 미술판 구조에 어떻게든 맞서 행동하고 싶다는 생각들이 담겼다. 작가들은 재개발을 풍자·은유하는 이미지들 속에 이런 비장한 일념을 담담하게 녹여 전해준다. 을지로에서 작업하며 전시를 총괄 기획한 차지량 작가는 전시장 서문에 적어놓았다. “나는 계속해서 이곳에 머물고 있다. 왜일까?…이곳에서야말로 주체적인 개인을 만날 수 있으니까…예술가, 관객, 시민, 시장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체적인 개인으로 움직이는 당신을 만난다. 나는 이곳에서 그것을 희망하고 있다.” 작가들은 23일 오후 2시 열리는 작가와의 대화에 나와달라고 박 시장에게 정식 초청장도 전달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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