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2.22 04:59
수정 : 2019.02.22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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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이노 거리에서 오물 수거 리어카를 끌고가는 청소부의 모습. 60~70년대엔 히라노가와에 떠다니는 오물을 오사카 시당국이 제대로 수거하지 않아 동포들이 직접 청소부에 의뢰해 오물을 치우는 작업을 맡겨야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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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사진가 고 조지현 회고전 ‘이카이노-일본 속 작은 제주’
1960~70년대 이카이노 동포마을
소박하고 정겨운 일상 풍경 속에
총련-민단 사이 날선 대립 드러나
창틀 벌어진 허름한 주택가에서
폐지 줍고 오물 치우던 차별의 그늘
일그러진 조선인 삶 고스란히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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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이노 거리에서 오물 수거 리어카를 끌고가는 청소부의 모습. 60~70년대엔 히라노가와에 떠다니는 오물을 오사카 시당국이 제대로 수거하지 않아 동포들이 직접 청소부에 의뢰해 오물을 치우는 작업을 맡겨야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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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전 일본 오사카시 외진 구석엔 과거의 낯선 ‘우리들’이 있었다.
벌목한 나무들로 가득한 좁은 하천 히라노가와의 시큼한 풍경, 제주 해녀 출신 이주민들이 잡은 해산물을 팔던 이쿠노의 조선시장이 시선을 파고든다. 그 시장 골목 안쪽에는 ‘개장국’이라고 선명하게 적은 골목 식당의 간판이 있고, 웃통을 벗은 조선인 장정이 그 앞을 걸어가고 있다. 골목 더 안쪽에선 볼이 퉁퉁한 조선아이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할머니·아줌마들은 어딘가 나들이를 하려는 듯 한복을 차려입었다.
지난 15일부터 서울 강남역 인근의 사진공간 스페이스22에 차려진 재일동포 작고 사진가 고 조지현(1938~2016)의 회고전은 1970년대 일본 한인촌의 모습을 지금 이 땅의 관객들 앞으로 옮겨 놓았다. 제목인 ‘이카이노(猪飼野)-일본 속 작은 제주’는 제주 출신의 사진가가 1948년 밀항해 이주한 뒤 유년기와 성장기를 보낸 오사카 동포마을의 이름이며, 그가 먹먹하게, 담담하게 찍은 사진의 배경이기도 하다.
이카이노는 6~7세기 백제인 조상들이 부근 나니와 포구에 이주해 백제항을 이루고 정착하면서 첫 인연을 맺었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제방공사를 위해 조선인들이 동원돼 마을을 형성한 것을 계기로 큰 규모의 조선인 마을이 만들어졌다. 지금도 일본 내 재일동포의 최대 밀집지역이지만, ‘돼지를 치는 곳’이란 뜻의 지명 ‘이카이노’는 1973년 홀연히 사라졌다. 이 지명이 붙으면 땅값·집값이 떨어지고, 혼담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등의 이유로 이웃 일본인 주민들이 강력한 민원을 넣어 이름을 지워버렸다는 풍문이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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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현 작가가 찍은 60년대말 오사카 이카이노의 조선 시장 풍경. 영주권을 죽음의 신청이라고 비난하며 한국적을 조선으로 고치자는 총련의 플랭카드가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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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이쿠노 코리아타운이 되어 한류에 열광한 일본 젊은이들과 관광객이 몰려드는 곳이 되었지만, 조 작가가 포착한 1960년대 이카이노의 풍경은 친숙하고 정겨우면서도, 적막하고 살벌한 느낌이다. 시장과 주택가, 골목에서 빚어내는 재일동포의 삶은 고달프고 힘겨운 잔영을 드리우고 있는데, 보이진 않지만 그들 머리 위로 지나가는 남북분단선을 포착했다. 분단의 대립은 당시 재일민단과 총련 사이에 첨예한 이슈였던 영주권 신청 여부를 놓고 나타난다. 영주권 신청은 죽음을 신청하는 것이라며 한국적을 조선국적으로 바꾸라고 선동하는 총련의 펼침막과, 거짓선전에 속지 말고 빨리 영주권 신청을 하라는 민단의 현수막이 따로 내걸려 대립한다. 하지만 작가의 눈길은 플래카드의 살벌한 기운을 넘어 그들이 어쩔 수 없이 겪고 넘어서야 하는 삶의 풍경으로 집약된다. 벽과 창틀 사이 아귀가 벌어진 허름한 주택가에서 작가를 쳐다보는 할머니, 벌목재가 들어찬 하천에서 노를 젓는 사람들의 신산한 움직임, 폐지를 주워 모으는 어르신들의 일그러진 표정, 샌들의 바닥 판을 떼어낸 폐기물 더미를 지나가는 학생들, 하천 오물을 리어카에 싣고가는 청소부의 모습은 그 시절 일본에서 차별과 생계의 질곡에 신음하던 한인들의 맨얼굴이다. 유명한 재일동포 시인 김시종이 <이카이노시집>의 권두에 올린 시 ‘보이지 않는 동네’는 조 작가의 작품에 대한 가장 적확한 설명이라고 할 만 하다. “없어도 있는 동네 / 그대로 고스란히 / 사라져 버린 동네…누구나 다 알지만 / 지도엔 없고…/일본이 아니니까 / 사라져도 상관없고 / 아무래도 좋으니 / 마음이 편하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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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목된 나무들로 가득한 히라노가와. 동포들의 밀집지역이던 이쿠노 일대를 관통했던 이 작은 하천에는 60년대 제재소들이 많아 나무들이 떠내려온 모습을 늘상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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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현 사진가는 대학 시절 문화유산 사진의 거장으로 유명한 도몬 겐의 광산촌 사진집을 탐독하면서 다큐 사진가의 길로 들어섰다. 자신의 태반이랄 수 있는 이쿠노를 시작으로 일본에서 차별받은 부락민의 삶을 포착한 르포 작업으로 명성을 얻었고, 사진집 <부락>(1975)과 <이카이노>(2003)를 발간한 바 있다. 2016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영화 <다이빙벨>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다큐 작업을 해온 사진가 안해룡씨가 옛 인연을 살려 그의 묵은 필름들을 전시에 내놓게 됐다. 안 기획자는 “ ‘이카이노’의 사진에는 동포들의 삶과 연결되는 절대적 빈곤의 세계가 있다”며 “현실과 부딪히면서 담아낸 저항정신의 발현으로 볼 수 있는 그의 사진을 통해 한민족 이주사의 한 역사를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3월5일까지. (02)3469-0822.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안해룡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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