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2.12 11:01
수정 : 2019.02.12 19:54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지은이의 ‘가미카제 아리랑’ 리뷰
탁경현 등 실제 자살특공대원 얘기에
가상공간 ‘조선인 술집’ 배경 삼아
‘천황폐하’ 외치며 스러져간 젊은이들의
혼돈과 모순에 찬 내면세계 묘사
일제강점기를 산 조선인들은 각자 다양한 삶의 지문을 찍어냈다. 그중엔 일본 천황 보위를 명분으로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자살특공대에 뛰어든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그들의 내면 풍경은 어떠할까? 연극 <가미카제 아리랑>의 토대가 된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2012년·서해문집)를 펴낸 길윤형 기자가 이 연극을 리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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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카제 아리랑’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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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는 무서운 것이야.”
칠흑 같은 어둠이 가신 무대에 모녀가 서 있다. 조선여인 김유자(이항나)와 그녀의 딸 마리(김채이)는 해방을 코 앞에 둔 1945년 봄, 일본 육군 항공기지가 있던 가고시마현 지란 부근에서 ‘두부김치’, ‘지지미(부침개)’, ‘도토리묵’, ‘막걸리’ 같은 조선 음식들을 파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재일조선인 작가 양석일의 소설 <피와 뼈>에 등장할 것 같은 괴물 같은 조선 사내 박성웅(변주현)이 휘두르는 폭력에 노출돼 있다.
모녀는 옛 전설을 회상하듯 아름다운 사쿠라(벚꽃)에 혼을 빼앗겨 요괴로 변하고 만 이들의 얘기를 주고 받는다. 이들이 지칭하는 요괴가 일왕을 위해 자살특공대가 되어 허무하게 숨져가는 일본 군인임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 요괴들 가운데엔 조선인이면서 일본을 위해 자살공격을 감행하다 숨진 10여명의 조선인 가미카제 대원들이 있었다.
극단 ‘극발전소301’이 9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초연한 연극 <가미카제 아리랑>은 요괴가 되고만 조선인 특공대원들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작품이다. 이들은 작품 팜플릿에서 “해방 후 70여년이 흐른 지금, 암울한 시대에 힘 없는 땅에 태어나 불행한 최후로 삶을 마감했던 조선 청년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여 보자”고 말한다.
이를 위해 <가미카제 아리랑>은 죽음을 앞둔 조선인 특공대원들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속내를 터놓을 수 있었던 가상의 공간인 ‘조선인 식당’을 연극적 배경 장치로 삼는다. 이 조선인 식당을 통해 일본 본토, 경성, 만주, 오키나와, 지란 등 제각각의 장소에서 각자 짧은 사연을 남기고 숨진 실존 인물 탁경현(배우 김경남)·최정근(임일규)·김상필(한일규) 등 조선인 특공대원들을 소환해 낸다. 대원들을 이곳에서 조선술 막걸리를 들이키며 “여기선 마음껏 숨을 쉴 수 있는 기분이예요” “여기마저 사라지면 많이 쓸쓸해질 거예요”라고 주인에게 속내를 터놓는다.
실제 조선인 특공대원들의 내면은 어땠을까. 연극에 나오는 인물이나 장면은 아니지만, 이들의 내면은 모순과 비애에 가득차 있었다. 동포들에게 “각자가 특공대가 되어 이 역사를 지켜주세요”라는 섬한 말을 남기고 숨진 특공대원 박동훈은 부친과 마지막 만남에서 “동생들은 절대 군에 보내지 말라”며 울며 신신당부했고, ‘일왕의 방패’인 일본 육사 56기생 최정근은 친했던 동기 오카바야시 다쓰유키에게 고뇌에 찬 얼굴로 “난 천황 폐하를 위해 죽을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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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카제 아리랑’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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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들은 현실에서도 연극에서도, 끝내 자신의 운명에 맞서진 못한다. “왜, 저 요괴 같은 일본에게 길들여진 것처럼 도망가지 못하는 거예요”라며 흐느끼는 마리에게 탁경현도, 최정근도, 김상필도 똑 부러진 답을 내놓지 못한다. 탁경현은 구슬픈 아리랑을 부를 뿐이고, 최정근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기억해 줬으면 한다”고 부탁하며, 김상필은 조선이 일본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자치권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를 들이댄다.
‘사쿠라의 세계’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가녀린 빛으로 어둠을 밝히는 작은 ‘반딧불이의 세계’다. 특공대원들은 “우리 조선인도 반딧불이가 되어 다시 조선 땅으로 돌아가게 되겠지”라고 말하며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다.
그리고 여름이 왔다. 해방은 기적처럼 별안간에 찾아온다. 대원들이 모두 떠난 식당으로 돌아온 것은 갑작스런 부대 변경으로 자살공격을 피한 18살 소년비행병 민영훈(권겸민)뿐이다. 극중 민영훈의 실제 모델은 민영락으로 그는 출격 직전 부대가 바뀌며 살아 돌아왔다.
작가의 바람처럼 조선인 특공대원들은 반딧불이가 되어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을까. 탁경현의 고향인 사천 사람들은 2008년 일본 배우 구로다 후쿠미가 주도한 위령비 건설을 거부했고, 대한민국은 일본군의 장교로 숨진 이들을 ‘친일파’로 단죄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최정근·김상필·탁경현은 여전히 일본의 전쟁에 협력한 친일파일 뿐이다. <가미카제 아리랑>은 에둘러 묻는다. 고작 스무살 청년들에게 무작정 이런 잣대를 들이대는 건 너무 가혹한 게 아닐까? 17일까지 공연. (02)6498-0403.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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