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판된 1집 중고 엘피 90만원
홍보용 2집 시디 100만원…
앨범 한장 남기고 자취 감췄던
유재하 음악경연 첫해 은상 수상자
결혼·육아로 음악과 멀어졌지만
“언젠가는 꼭…” 열정이 결심으로
“고가에도 내 음반 찾는 팬에 미안
모든 걸 쏟아내며 멈춤 없이 노래”
사반세기 만에 새 앨범을 들고 돌아온 싱어송라이터 정혜선. 제라스타 엔터테인먼트 제공
1992년 단 한장의 제대로 된 앨범을 남기고 자취를 감춘 가수가 있다. 절판된 앨범의 중고 엘피(LP) 가격은 90만원까지 치솟았다. 정식 발표도 못한 두번째 앨범의 홍보용 시디(CD)는 100만원 넘는 가격에 거래됐다. 미국에선 무명가수였지만 지구 반대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슈퍼스타가 된 로드리게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서칭 포 슈가맨>만큼 극적이진 않아도, 한국판 ‘슈가맨’이라 부를 만하다. 그가 사반세기 만에 새 앨범을 들고 돌아온다. 진짜 슈가맨도 이루지 못한 ‘꿈의 귀환’이다.
그의 이름은 정혜선. 성신여대 지리학과 86학번 대학생은 음악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배운 적도 없었다. 중학생 때부터 레드 제플린, 레너드 스키너드, 저니, 시카고, 토토 등 록 음악을 열심히 들었을 뿐이다.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 등이 큰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지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요제는 따로 있었다. 1989년 제1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에 통기타를 사서 한달간 독학했다. 난생 처음 노래도 만들었다. ‘나의 하늘’이란 곡으로 출전한 정혜선은 덜컥 은상을 받았다. 그의 위로는 1위에 해당하는 금상의 주인공 조규찬밖에 없었다.
싱어송라이터 정혜선이 1992년 발표한 1집 앨범 표지. 파격적으로 앞서간 음악으로 평단의 극찬을 받았지만, 대중적으론 실패하고 말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갈무리
대회 심사를 맡은 하나음악의 좌장 조동진이 그에게 “노래 좀 가져와봐라” 했다. 1990년대 전설의 음악공동체 하나음악은 당시 막 태동하던 참이었다. 정혜선은 한달 만에 9곡을 만들어 들고 갔다. 조동진은 만족해하며 그대로 앨범에 넣자고 했다. 조동진의 동생 조동익이 편곡을 맡았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이 하나음악 1호 앨범인 정혜선 1집이다. 당시만 해도 앨범 전 곡을 작사·작곡한 여성 싱어송라이터는 거의 없었다. 노래는 전에 없던 독특한 스타일이었고, 창법은 원초적이고 자유로웠다. 하나음악의 연주자 조원익은 “참 좋은데 너무 앞섰다. 그래서 잘 안될 것 같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평단은 극찬했지만 대중적으론 실패하고 말았다.
1집 실패 뒤 집에서 쉬고 있는데, 김중만 사진작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그는 정혜선 2집을 제작하고 싶다 했다. 1995년 녹음까지 다 마치고 발매만 기다리고 있던 중,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김중만 작가가 개인 사정으로 한국을 떠나야 해 음반 제작을 중단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2집은 빛도 보지 못한 채 일부 홍보용 음반만 시중에 떠돌았다. 알음알음으로 퍼진 타이틀곡 ‘꿈속의 꿈’은 피시(PC)통신 천리안 음악동호회 두레마을에서 선정한 ‘우리가 죽기 전에 들어야 할 100곡’에 선정되기도 했다.
반세기 만에 새 앨범을 들고 돌아온 싱어송라이터 정혜선. 제라스타 엔터테인먼트 제공
2집마저 좌절되자 당분간 음악을 쉬기로 했다. 1998년 결혼해 애 낳고 살다보니 음악과는 더더욱 멀어졌다. 그래도 ‘언젠가는 음악을 다시 하겠다’는 생각은 버리지 않았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뒤 문득 음악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우선은 희귀 음반을 고가에 사면서까지 자신의 음악을 찾는 팬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2017년 1인 회사를 차리자마자 2집 수록곡 4곡을 리메이크해 미니앨범(EP) <꿈속의 꿈>으로 발매한 건 그 때문이다. 몇달 뒤엔 1집을 리마스터링해 재발매했다.
이어 새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20년 넘게 쌓인 음악적 영감이 화산이 폭발하듯 분출돼 나왔다. 지난해 봄 8곡을 만들어 여름에 녹음했다. 그렇게 해서 만든 3집 <시공초월>을 디지털로 순차적으로 발표하기로 했다. 지난달 18일 <파트1> 3곡을 먼저 공개했다. 일렉트로닉 성향의 ‘예측불허’, 감성적인 록 발라드 ‘소용돌이’, 미세먼지를 모티브로 한 얼터너티브 록 스타일의 ‘공기질’이다. 이어 17일 ‘내 옆자리’ ‘어쩌라고’ ‘나타나줘’를 담은 <파트2>를 공개했다. 다음달 19일에는 ‘반면교사’ ‘안젤리나’ 공개와 함께 3집 전 곡을 담은 시디와 엘피를 발매한다. 곡마다 다른 스타일과 창법을 구사하는 내공은 시공을 초월한 듯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
싱어송라이터 정혜선이 17일 디지털로 발표한 3집 <시공초월> 파트2 음원 표지. 제라스타 엔터테인먼트 제공
정혜선은 3월16일 서울 서교동 롤링홀에서 3집 발매 기념 공연을 할 예정이다. 최근 서울 공덕동 한겨레 사옥에서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나의 100%를 쏟아내겠다는 각오로 준비중”이라고 말했다. 벌써 신곡도 작업중이다. “긴 공백을 되갚으려는 듯 새 음악이 계속 쏟아져나오고 있어요. 이대로라면 4집도 곧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젠 멈춤 없이 죽을 때까지 음악을 할 겁니다. 요즘 제2의 인생 얘기를 많이 하는데, 나이 들어도 더 활기차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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