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01.13 17:13 수정 : 2019.01.16 20:57

민중가요 대표곡 중 하나인 ‘파업가’를 작곡한 김호철 음악가. 지난해로 파업가 30주년을 맞았다. 진승일 작가 제공

1980년대 노동현장 뛰어든 김호철
윤민석과 함께 민중음악 중심으로

아내의 암 투병과 건강 악화 소식에
동지들이 투병 기금 마련·음반 제작

‘꽃다지’ 정윤경 감독이 21곡 추리고
노동자 노래패 등 90여명 녹음 참여
1000명의 후원자 제작비 ‘십시일반’

김호철 “쑥스럽고 미안” 인터뷰 고사
“파인텍 굴뚝 농성, 나팔 불어야 하는데…”

민중가요 대표곡 중 하나인 ‘파업가’를 작곡한 김호철 음악가. 지난해로 파업가 30주년을 맞았다. 진승일 작가 제공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하나 되어 우리 나선다/ 승리의 그날까지/ 지키련다 동지의 약속/ 해골 두쪽 나도 지킨다/ 노조 깃발 아래 뭉친 우리/ 구사대 폭력 물리친 우리/ 파업 투쟁으로 뭉친 우리/ 해방 깃발 아래 나선다/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하나 되어 우리 나선다/ 승리의 그날까지/ 승리의 그날까지”

지난해 30주년을 맞은 ‘파업가’ 악보.
1989년 전국노동자대회에 참가한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 박종진씨는 그곳에서 ‘파업가’를 난생처음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노동자들의 단결을 강조하는 노래를 들으며 그는 눈물을 흘렸다. 회사로 돌아온 그는 노동조합원들에게 이 노래를 전했다. 그는 사내 노동자 노래패 ‘노래마당’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파업가’를 해마다 100번은 불렀던 것 같아요. 지금도 노래패 활동을 하고 있는데, 정년퇴임할 때까지 ‘파업가’를 계속 부를 겁니다.”

‘파업가’는 민중가요 음악가 김호철(61)이 1988년 늦가을 서울 영등포산업선교회 노동자 집회에서 처음 선보인 노래다. 이 노래를 만든 김호철은 원래 음악과는 거리가 먼 체육학도였다. 1978년 한국체육대학교 태권도학과에 입학한 김호철은 1980년 총학생회장이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이후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서울의 봄’ 당시, 대학생들이 서울역 광장에서 시위를 하다가 유혈사태를 우려해 해산한 ‘서울역 회군’에 그는 끝까지 반대했으나 소수의견에 그치고 말았다. 이후 투옥됐다가 강제징집 당해 군대에 끌려간 그는 군악대에 지원해 합격했다. 거기서 트럼펫을 배우며 음악과 인연을 맺었다. 이미 학사 제적된 터라 제대 뒤에는 밤무대를 전전하며 트럼펫을 연주하기도 했다.

‘파업가’ 30주년을 맞아 제작된 김호철 헌정음반.
1980년대 중반 노동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던 여동생을 따라 김호철도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서울 구로공단에 위장취업해 들어간 그 즈음부터 노동자를 대변하는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노래를 만들면 바로 동료들에게 불러보게 하고는 부르기 힘들어하는 대목을 고쳐가며 노래를 완성했다. ‘단순조립공’ ‘X에게’부터 시작한 김호철의 노래 계보는 ‘단결투쟁가’ ‘파업가’ ‘포장마차’ 등으로 이어졌다. 그 중 ‘파업가’는 노동운동계의 애국가 같은 존재가 됐다. 그는 ‘노동자 노래단’을 주도하며 당시만 해도 운동권 학생들 중심의 ‘운동가요’를 뛰어넘어 ‘민중가요’의 지평을 열었다. 1987년부터 2000년까지 발표된 민중가요 중 김호철이 7%(88곡)를 작사했고 9%(114곡)를 작곡한 것으로 집계될 만큼 그는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가 만든 노동조합가만 해도 100곡이 넘는다. 피디(PD·민중민주) 성향의 김호철은 엔엘(NL·민족민주) 계열의 작곡가 윤민석과 함께 민중음악계의 뚜렷한 양대산맥을 형성했다.

서정민갑 대중음악 의견가는 “김호철은 고급스럽고 지적인 노래보다 노동자들이 절절하게 공감할 수 있는 노래, 그들의 삶을 정직하고 치열하게 담은 노래를 만드는 데 치중했다. 그는 군가풍 리듬이나 뽕짝 스타일을 피하지 않았다. 음악적 훈련을 받지 않은 노동자들에겐 그 스타일이 익숙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최근까지도 꾸준히 노동자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온 김호철에게 지난해 봄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날아들었다. 민중가수이자 그의 아내인 황현이 희귀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남편의 헌신적인 간병에도 아내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져만 갔다. 치료비를 감당하기 힘들어졌고, 김호철의 건강마저 나빠졌다.

1989년 11월 서울대에서 열린 전노협 건설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 한겨레 자료사진
이 소식을 들은 주변 동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원주점을 열어 투병기금을 마련하기로 했다. 그가 만든 노래들을 불러온 노동자들이 기꺼이 팔을 걷어붙이고 합세했다. 지난해 7월 열린 후원주점에서 1억원 가까이 모였다. 이를 투병기금으로 전달했다. 이와 별도로 동료들은 김호철 헌정음반 제작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때마침 ‘파업가’가 세상에 나온 지 30돌 되는 해였다. 프로젝트를 알리니 1000명의 후원자들이 순식간에 모였다. 각자 5만원씩 내고 공동제작자를 자처했다. 그렇게 해서 ‘김호철 헌정음반 공동제작단’이 만들어졌다. 노래패 꽃다지의 정윤경 음악감독이 음반 프로듀서를 맡았다.

정 감독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김호철이 만든 406곡을 듣고 또 듣는 일이었다. 두달간 듣고 가까운 사람들과 토론하며 음반에 실을 21곡을 추렸다. ‘파업가’ ‘단결투쟁가’처럼 노동운동 현장에서 널리 불린 노래뿐 아니라 잘 안 알려진 숨은 명곡들도 발굴해냈다. “이 작업이 제일 힘들었어요. 호철이 형의 음악을 밤새 듣고 있으니, 형의 의지, 분노, 절망, 한숨 같은 게 그대로 전해지는 듯해 고문과도 같았어요. 형이 참 많이 아파했구나, 통곡하고 괴로워했구나, 다 느껴져서 너무 괴로웠죠.”

정 감독은 “처음에는 댄스그룹 거북이가 노찾사 ‘사계’를 완전히 뒤집었던 것처럼 원곡을 확 바꿔볼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몇십년간 ‘파업가’와 함께해온 이들의 추억에 흠집을 내고 싶진 않더라”고 했다. 그래서 ‘파업가’ ‘단결투쟁가’처럼 익숙한 노래는 최대한 원곡 분위기대로 편곡했다. 다만 감상하기에 편안하게 속도와 키를 살짝 낮췄다. 나머지 노래들은 감성적인 노랫말을 느끼며 감상할 수 있도록 담백한 포크 스타일 등으로 바꿔 편곡했다. “집회장에서 소비되는 형태가 아니라 집에서 차분히 감상할 수 있는 음반을 만들고 싶었다”고 정 감독은 말했다.

정윤경 음악감독과 민중가수들이 김호철 헌정음반을 녹음하고 있다. 박성훈 작가 제공
정 감독은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이 가창자로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민중음악계에 몸담고 있는 이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기껏해야 차비 정도만 줄 수 있는 형편이었는데도 모두들 기꺼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현역 민중가수 27명, 4·16합창단 18명, 노동자 노래패 31명, 연주자 9명에다 엔지니어까지 합하면 모두 90여명이 음반 녹음에 참여했다. 좀처럼 한 자리에 모이기 힘든 민중가수들이 스튜디오에 모여 노래하면서 “언제 이런 걸 또 해보겠느냐. 김호철 이름으로 이렇게 모일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전국에서 공개모집한 노동자 노래패 31명은 ‘구속동지 구출가’ ‘민주노조 사수가’ ‘노동악법 철폐가’ 등 3곡을 불렀다. 스튜디오에서 매끈하게 녹음하는 대신 현장의 거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일부러 비정규직 노동자 쉼터 ‘꿀잠’에서 녹음을 진행했다. 기타·베이스·북의 단출한 연주에 맞춰 31명이 노래하는 걸 중간에 끊지 않고 한번에 녹음했다. 녹음을 끝마친 순간 모두가 “와~” 소리치며 환하게 웃었다. 녹음에 참여한 박종진씨는 “분위기가 참 좋았다. 노래하면서 옛날 생각도 많이 났고 가슴이 벅차올랐다”고 전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파업가 30주년 김호철 헌정음반>이 지난달 나왔다. 2500장 찍은 시디(CD)가 모두 나가서 1500장 더 찍었다. 지금까지 모두 3000장가량 나갔고, 문의가 계속 오고 있다고 한다. 음반은 ‘노동의소리’ 누리집(http://nodong.com)을 통해 살 수 있다. 최근에는 각종 음원사이트에서도 들을 수 있도록 음원 서비스를 시작했다. 정 감독은 “헌정음반을 내고 들은 칭찬이 지난 20년 동안 음악 하면서 받은 칭찬보다 많았다. 호철이 형도 ‘윤경아, 눈물 나더라. 고맙다’는 문자를 보내왔다”고 전했다.

파업가 30주년 김호철 헌정음반의 프로듀서를 맞은 노래패 ‘꽃다지’의 정윤경 음악감독. 박성훈 작가 제공
서정민갑 대중음악 의견가는 “음반을 듣고 김호철이 행진곡풍 투쟁가에만 재능을 발휘한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아름다운 노래를 많이 쓴 작곡가였다는 사실을 재발견했다”고 했다. 그는 이어 “‘파업가’ 30년의 역사는 김호철만의 역사가 아니다. 수많은 노동가수들과 노동자들이 함께 쓴 역사가 이 한장의 음반에 담겼다. 이를 계기로 우리 노동가요·민중가요를 되짚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작업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겨레>는 김호철에게 정식 인터뷰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열심히 살았다고는 하지만 노동자의 삶은 그대로인 상황에서, 패배한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인터뷰 하는 것 같아서 못하겠다”고 완강히 고사했다. 대신 그는 지난 10일 밤 <한겨레>와 한 전화통화에서 “헌정음반이 나온 게 쑥스럽고 동지들에게 미안하다. 아내도 어서 좋아지고 해서 나도 동지들 곁에 가서 노래하고 싶다”는 소감을 전했다. 그는 “75미터 높이 굴뚝에서 400일 넘게 고공농성 중인 파인텍 동지들에게 가서 나팔이라도 불며 힘이 돼줘야 하는데, 그럴 처지가 아니라 참 힘들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음날인 11일 파인텍 노사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면서 금속노조 파인텍지회 홍기탁 전 지회장과 박준호 사무장이 농성 426일 만에 땅으로 내려왔다. 관련 뉴스를 보는 순간, 김호철이 마음으로 부는 나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