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서울 서초동 재즈클럽 야누스에서 한국 재즈계의 대모 박성연이 노래하고 있다. JNH뮤직 제공
[울림과 스밈]
척박한 토양에서 한국 재즈 산실된 ‘야누스’ 40살 생일상
디바 박성연 휠체어 앉아 ‘마이 웨이’ 부르자 눈물과 박수
1세대 연주자 8명 남았지만 “100년 가는 클럽” 꿈꾼다
지난 23일 서울 서초동 재즈클럽 야누스에서 한국 재즈계의 대모 박성연이 노래하고 있다. JNH뮤직 제공
“The record shows I took the blows/ I did it my way~”(지난 세월이 말해주듯 난 온갖 역경을 맞았고, 내 방식대로 해왔어)
박성연은 노래 ‘마이 웨이’ 마지막 소절을 토해내듯 쏟아냈다. “마이~”를 더 길게 끌고 싶었으나 힘에 부쳐 짧게 끊은 게 못내 아쉬웠는지, ‘오 마이 갓’을 소리 없이 삼켰다. 하지만 관객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70대 중반 디바가 평생 걸어온 길이 고스란히 녹아든 노래에 감동과 존경의 박수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들은 알았다. 박성연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40년 전인 1978년 11월, 젊은 박성연은 발을 동동 굴렀다. 재즈클럽 야누스가 서울 신촌에서 처음 문을 여는 날, 손님들이 기다리는데 아직 탁자와 의자가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클럽 이름을 지어준 영문학자 문일영 선생이 “괜찮아, 괜찮아” 하며 박성연의 등을 토닥였다. 박성연이 “재즈를 실컷 노래하고 싶어” 직접 차린 한국 최초 토종 재즈클럽 야누스의 시작은 이처럼 미약했으나, 곧 한국 재즈의 산실이 되었다.
재즈 불모지 한국에서 소중한 싹을 틔운 이들이 있다. 재즈가 좋아 미군부대 클럽에서 어깨 너머로 보고 독학한 한국 재즈 1세대 연주자들이다. 이들이 생계를 위해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하고 밤 늦게 모여든 곳이 야누스였다. 여기선 재즈를 마음껏 연주할 수 있었다. 매일 밤이 축제였다. 그들이 있었기에 한국에 재즈가 알려졌고, 재즈를 공부하러 유학을 다녀오는 후배들도 늘어갔다.
하지만 재즈는 늘 비주류였다. 야누스 또한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신촌·대학로·청담동을 거쳐 지금의 서초동 교대역 부근으로 옮겨야 했다. 빚이 쌓여가자 박성연은 2012년, 평생 모아온 자식과도 같은 엘피(LP) 1700장을 단돈 1000만원에 팔았다. 그럼에도 지속된 경영난에다 지병마저 악화되자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결국 2015년 아끼는 후배 보컬리스트 말로에게 야누스를 넘기고 병원에 입원했다.
지난 23일 서울 서초동 재즈클럽 야누스에서 박성연(오른쪽)과 말로가 함께 노래하고 있다. JNH뮤직 제공
지난 23일 저녁, 박성연은 오랜만에 야누스를 찾았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야누스 탄생 40돌 축하무대가 펼쳐지는 날이었다. 휠체어에 앉은 채 입장하자 야누스를 가득 메운 관객들이 박수로 뜨겁게 환영했다. 무대로 직행한 박성연은 곧바로 노래를 시작했다. “밥 먹는 것처럼 매일 노래해야 하는 사람”이 병원 6인실에 누워만 있었으니 오죽 배고팠을까. “연습을 못해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하면서도 노래하는 내내 그의 얼굴에선 행복이 넘실댔다. “결혼도 못하고 적자만 냈지만, 후회는 없어요. 40년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야누스를 할 거예요.”
2부 무대에선 젊은 연주자 20여명이 자유롭게 즉흥연주를 펼쳤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그들 모습 위로 40년 전 신촌에서 왁자지껄했을 1세대 연주자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지난 4월 클라리넷 연주자 이동기가 숨을 거두면서 이제 1세대 연주자들은 8명만 남았다. 이날 2부 무대 문을 연 1세대 피아니스트 신관웅은 “야누스는 고향 같은 곳이다. 외국처럼 100년, 200년 가는 재즈클럽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날은 곧 닥칠 겨울을 예고하듯 꽤 쌀쌀했다. 사실 야누스와 한국 재즈는 늘 추운 겨울이었다. 이젠 봄이 올 때도 됐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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