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9.17 19:17
수정 : 2018.09.17 20:56
[짬] 세번째 목판화 개인전 연 조진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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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신작’ 목판화를 서울에서 전시하면서 화가 본업으로 돌아온 조진호 작가. 사진 임종업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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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조진호·무유등등(無有等等)>전(9월5~21일)이 열리고 있다. ‘한국 현대 목판화 발굴 프로젝트’ 시리즈 첫회에 해당한다. 35×24cm 소품 ‘오월의 소리 1980 ll’에서부터 150×75cm 대작 ‘학살도’까지 1980년부터 90년까지 제작한 목판화 작품 41점을 걸었다. 1980년 활동을 시작해 개인전 14회를 열었고, 수백 여 차례 단체전에 참가한 화력 38년의 조진호(67) 작가한테 ‘발굴’이라니? “80년대 목판화, 특히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제작된 작품을 끄집어내 한국 현대 판화사를 정립하는 의미에서 발굴이라는 표제를 붙였다”는 게 김진하 나무아트 관장의 설명이다. 10일 전시장에서 작가를 만나 작품에 얽힌 사연을 들었다.
1980년대 작업한 ‘오래된 신작’ 41점
발표나 판매하지 않은 작품들 대부분
‘한국 현대 목판화 발굴 프로젝트’ 21일까지 서울에서 ‘무유등등’ 전시
광주시립미술관장 마치고 본업 전념
“작품의 뿌리 ‘오월 광주’ 초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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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 목판화 ‘무유등등’(1990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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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포장해 넣어둔 이래 28년동안 이삿짐이었던 목판 꾸러미를 처음으로 뜯었어요. 전시 준비를 위해 다시 찍으면서 그 시절 그 느낌이 되살아나더군요.”
대부분 작품에는 에디션 번호가 아닌 ‘에이피’(AP·작가 소장용 프린트)로 표기돼 있다. 80년대 초반 해마다 5월 광주 금남로 2~3가에서 열린 거리미술제를 통해 선보였거나 83년 출간된 <오월시 판화집-가슴마다 꽃으로 피어 있어라>에 김경주 작가의 것과 함께 실은 작품이니 서울에서는 신작에 해당한다. 발표 또는 판매를 고려치 않고 틈틈이 판각해 두었다가 이번에 찍은 나머지 작품들은 작가에게도 ‘오래된 신작’인 셈이다.
밑그림 없이 판각해 일러스트 느낌이 나는 모색기(80~82년), 공포·불안·분노 등을 표현주의적으로 드러낸 <오월시 판화>, <잡풀베기> 연작(83~84), 서민의 삶과 향토적 정서를 사실적으로 재현한 작업(85~90년), 그리고 무등과 광주정신을 호방하게 풀어낸 <무유등등>(86~90년)이 그것이다. 20대 말에서 30대 후반까지 작가의 싱싱한 정서와 패기가 고스란히 박혔다.
“제가 본래 현실감각이 떨어져요. 아내한테 늘 지청구를 듣죠. 살다보면 세 번 기회가 온다는데, 지역작가한테 상경이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러 번 서울행 계기가 있었지만, 광주에 머물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울살이가 밥벌이와 이름내기에 좋았을지 모르지만 정신적으로 황폐해졌을 거예요.” 작가는 모름지기 자기가 발을 딛고 사는 고향을 표현해야 한다며 광주와 ‘오월광주’는 그에게 작품의 자양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80년 5월19일 조선대 앞 화실에서 목격한 공수부대원 모습을 떠올렸다. “군인들이 학교 앞 가게에서 컵라면을 사서 아귀같이 먹더군요. 무슨 일인지 물으니 대침투훈련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줄만 알았죠.” 화실에 있던 그는 이틀 내리 찾아와 집으로 가자는 어머니의 청에 못 이겨 ‘9번 버스’를 타고 광주를 탈출한 기억을 떠올렸다.
“광주 시내를 관통하는 노선이었는데, 시민회관 사거리에 이르니 차가 옴짝달싹 못하게 됐어요. 군인들이 젊은이를 차에서 끌어내려 무릎을 꿇리고 개머리판으로 가격하고 있었어요. 용감한 운전기사가 차를 후진해 뒤차를 들이받아 틈을 벌린 다음 방향을 틀어 광주고교 쪽으로 논스톱으로 달렸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마지막 버스였더군요. 집에서도 이불에 씌워진 채 5월26일까지 감금됐어요.” 최후 거점인 전남도청이 무참히 진압된 뒤인 27일 시내로 나온 그는 이틀 동안 총탄 자국을 메우고 새로 페인트칠을 하는 등 계엄군의 정리 작업을 지켜보았다.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조각칼을 들었어요. 무엇보다 도망자였다는 자책감이 컸죠.” 목격담과 사진 등을 바탕으로 학살 현장과 시민들의 분노와 불안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운동으로서의 작품은 시간이 지나면서 표현의 한계에 이르러 황폐한 고향과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으로 비켜가면서 광주 정서를 드러내는 식으로 변화해갔다. ‘오월광주’가 항쟁 현장만이 아니라 시민군을 낳은 붉은 땅과 늙은 부모들까지 포괄한다는 생각에서다. 산 너머 피어오르는 연기와 등장 인물의 깊은 주름살에서 그들이 ‘광주’는 물론 해방과 한국전쟁 등 곤고한 현대사를 관통해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90년대 들어 동구권 붕괴와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운동권의 목판화 활동은 시들해졌고 작가는 자연스럽게 수채화 쪽으로 무게를 옮겼다. 2014년부터 최근까지 광주시립미술관장을 맡아 미술행정에 전념하면서 작품 활동이 뜸해지기도 했다.
“38년 세월이 지났지만 저는 변한 게 없어요. ‘오월광주’ 초심으로 다시 돌아갈 거예요. 그때 철저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떨쳐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렵니다.” 행정 일선에서 물러나 초기작들 앞에 선 노작가의 표정은 마치 30대였다. 수채화 작업에서 만들어진 조형 감성과 60대의 연륜이 목판에 어떻게 발현될지 기대된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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