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 한겨레 · 멜론 · 태림 공동기획 _ 91~100위 공개
한겨레가 음원사이트 멜론, 출판사 태림스코어와 공동기획으로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 선정 작업을 진행했다. 음악평론가, 음악방송 피디, 음악 전문 기자 등 47명이 투표한 결과를 바탕으로 1위부터 100위까지 순위를 매겼다. 한겨레는 8월28일부터 9월28일까지 한 달 동안 순위를 역순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정오에 열 장의 앨범을 공개하고, 그 가운데 두 장의 앨범을 꼽아 전문가 리뷰를 소개한다. 전체 앨범을 듣거나 전문가 리뷰를 보려면 맨 마지막에 안내한 멜론 특집 페이지로 가면 된다. 한국 대중음악 명반 91~100위 91위 패닉 〈Panic〉 (1995)
- 이적, 김진표 듀오의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데뷔 앨범
92위 전람회 〈Exhibition〉 (1994)
- 김동률의 시작점으로, 한국 발라드의 품격을 높인 앨범
93위 할로우 잰 〈Rough Draft In Progress〉 (2006)
- 한국 포스트록의 신기원을 연 앨범
94위 장기하와 얼굴들 <별일 없이 산다> (2009)
- 인디 뮤지션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의 가능성을 증명한 앨범
95위 안치환 〈안치환4〉 (1995)
- 민중가요와 대중가요를 접합시켜 민중가요의 대중화를 이뤄낸 앨범
96위 f(x) 〈Pink Tape〉 (2013)
- 대형 기획사의 시스템의 장점을 극대화한 한국 아이돌 음악의 야심작
97위 버벌 진트 〈누명〉 (2008)
- 자신, 그리고 나아가 한국힙합에 씌워진 누명을 벗어 던진 앨범
98위 더블유 〈Where The Story Ends〉 (2005)
- 코나 출신 배영준이 결성한 일렉트로 팝 그룹 더블유의 2집
99위 윤영배 〈위험한 세계〉 (2013)
- 하나음악 출신 윤영배가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낸 앨범
100위 송창식 〈사랑이야/토함산〉 (1978)
- 포크 장르를 우리 정서에 맞게 토착화한 앨범
91위 패닉 〈Panic〉 (1995) 리뷰 | 첫 앨범은 아티스트가 가장 긴 시간을 준비해 완성하는 작품이다. 음악인이 되리라 마음먹은 후 오랜 수련기간을 거치고 여러 습작을 토해낸 뒤 나오는 것이 첫 앨범이다. 첫 앨범을 발표한 뒤 얼마간의 기간을 두고 두 번째, 세 번째 앨범을 발표하고 여러 앨범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비로소 아티스트로서 커리어가 형성된다. 아티스트의 가장 긴 노력이 결집된 것이 바로 첫 앨범인 것이다. 그 때문일까? 데뷔작이 최고작으로 남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실제로 여러 명반 리스트를 보면 첫 앨범이 선정된 사례가 많다. 이 리스트에도 여러 ‘1집’들이 대거 포함돼 있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첫 앨범으로 역사는 시작된다. 그런 면에서 패닉의 1집 〈Panic〉은 매우 드라마틱한 시작점이었다. 주류세대에 대한 반항의 메시지, 음악적 실험과 완성도, 정제되지 않은 에너지, 확고한 정체성, 신인의 패기 등 온갖 용감한 도전들로 가득한 앨범이었다. 90년대는 이러한 도전이 종종 상업적 성공으로도 이어지는 호시절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그랬고, 넥스트가 그랬으며, 패닉이 그 뒤를 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방식은 패턴화되어 이후 등장하는 H.O.T. 등 아이돌그룹 생산 전략으로 이어졌다. 넥스트나 패닉의 방식은 패턴화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빛이 날 수 있었다. 90년대에는 메이저 기획사가 다소 실험적인 음반들을 제작하기도 했다. 덕분에 인디신이란 것이 생겨나기 전에 이미 삐삐밴드, 유앤미블루와 같은 충격적인 음악들이 가요계에 등장했다. 패닉의 1집을 제작한 곳도 당시 최고의 메이저 기획사 신촌뮤직이었다. 이적은 “우리의 모델은 삐삐밴드 같은 것이어서 이것저것 해보자는 식”으로 1집을 만들었다고 말했는데, 그만큼 이들의 음악은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가 멀게 보였다. 하지만 ‘달팽이’와 ‘왼손잡이’가 크게 히트하면서 패닉의 음악은 당시 10대들에게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 ‘계산되지 않은 음악’이 드라마틱한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후 이적은 ‘포스트 서태지’라는 수식어에 가장 근접한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했다. 〈Panic〉은 그야말로 패기로 가득 찬 앨범이었다. 다소 음산하게 시작하는 첫 트랙 ‘Intro: Panic Is Coming’의 가사만 읽어봐도 가요계에 던지는 그 출사표의 무게를 짐작해볼 수 있다. 앨범 전체에 걸쳐 어느 곡 하나 기존 가요의 관성을 마냥 따라가는 곡이 없었다. 패닉을 세상에 알린 발라드 ‘달팽이’ 역시 기존 히트 발라드의 감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사랑을 다루지 않은 발라드가 이렇게 공전의 히트를 친 경우는 매우 찾아보기 힘들다. 이외에도 ‘왼손잡이’, ‘아무도’ 등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 찬 가사는 정말로 신선했다. 새로운 음악에 목마른 10대들의 감성을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패닉의 1집이 나오고 1년 뒤 SM엔터테인먼트가 H.O.T.를 성공시키면서 10대들의 감성은 아이돌그룹의 음악이 점령하기 시작했다. ‘계산된 음악’이 시장을 잠식해나간 것이다. 때문에 아쉽게도 패닉은 다양한 음악이 대중에게 각광받은 90년대 호시절의 마지막 영웅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적은 긱스, 카니발을 거쳐 솔로로 출중한 앨범들을 연달아 발표하며 결국 살아남았다. 〈Panic〉이 나왔던 1995년 당시 20대 초반이던 이적은 자신이 마흔 넘어서까지 좋은 음악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이나 했을까? 그리고 〈Panic〉이 자신의 최고작으로 남으리라는 것을 알았을까? 추천곡 ‘기다리다’| 이적의 발라드를 만들어내는 재능은 정말 탁월하다. 이 재능은 한국 가요시장에서 히트곡을 만드는 능력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는 이 재능을 결코 남용하지 않고 좋은 앨범을 만드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기다리다’는 ‘달팽이’와 함께 1집을 듣는 청자에게 안도의 순간을 제공한다. 덕분에 다른 곡들의 통통 튀는 발칙함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권석정/카카오엠 피디 96위 f(x) 〈Pink Tape〉(2013) 리뷰| 수많은 아이돌 그룹 중에서도 2009년에 데뷔한 에프엑스(f(x))의 입지는 특별했다. 데뷔곡부터 주재료로 삼은 일렉트로니카, 랩과 노래의 경계에서 넘실대는 창법, 난해한 노랫말 등 이전의 어떤 팀에서도 본 적이 없는 독특함이 이들의 무기였다. 2010년 발표한 ‘NU ABO’에서 정체성을 선명히 드러낸 그룹은 ‘피노키오(Danger)’와 ‘Hot Summer’, ‘Electric Shock’를 거치며 자신만의 브랜드를 공고히 했다. 음악과 콘셉트의 측면에서 에프엑스 같은 팀은 당시에도, 그 이전에도 없었다. 이와 같은 포지셔닝은 정규 2집 〈Pink Tape〉에서 정점을 보였다. 앨범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밝혀지기 전에 공개한 ‘아트 필름’부터 파격이었다. 오직 프로모션을 위해 제작된 2분 남짓의 영상물은 신곡을 배경으로 다양한 오브제를 감각적으로 배치, 구성해 에프엑스만의 캐릭터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화면 속 환상적, 동화적이면서 천진난만하고 패셔너블한 모습은 역시 지금까지의 걸그룹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성격이었다. 에프엑스의 이러한 캐릭터 구축과 활용은 2010년대 아이돌 음악 시장에서 걸그룹 콘셉트의 다변화로 이어졌다. 영리한 비주얼 연출만큼이나 음악적 기획 또한 뛰어났다. 이 무렵 SM엔터테인먼트는 해외 작곡가들을 대거 섭외하고 국내외 작곡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곡을 제작하는 대규모 ‘송라이팅 캠프’를 본격적으로 진행했는데, 〈Pink Tape〉는 해당 프로젝트가 앨범 단위로 거둔 중대한 결실이었다. 외국 작곡가의 곡을 한국 작곡가가 국내 시장에 맞춰 다듬고 발표하는 것은 에스이에스(S.E.S.)의 ‘Dreams Come True’(1998)부터 존재한 작업 방식이나, 〈Pink Tape〉는 한 장의 앨범 자체가 ‘송라이팅 캠프’를 통했다는 점에서 달랐다. 글로벌 대중을 공략함과 동시에 작품성 획득을 꾀한 것이다. 그렇게 국제 합작으로 탄생한 12곡의 수록곡은 ‘웰메이드 케이팝’의 본보기였다. 앨범은 복잡하게 쪼갠 리듬 패턴과 예상치 못한 전개가 돋보인 타이틀곡 ‘첫 사랑니(Rum Pum Pum Pum)’부터 덥스텝과 트랩, 하우스 등 EDM 소스를 적소에 활용한 ‘Toy’, ‘Kick’, ‘Airplane’, ‘Step’과 같은 고감도 일렉트로닉 댄스팝이 주를 이뤘다. 엑소(EXO)의 디오(D.O.)가 참여한 어쿠스틱 팝 ‘Goodbye Summer’, 멜로디 진행에 역점을 둔 ‘여우 같은 내 친구(No More)’, 곡 전반에 사용된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를 통해 신선도를 높인 미디엄 템포 ‘Ending Page’는 음반의 짜임새를 높이는 데 일조한 노래였다. 〈Pink Tape〉는 대형 기획사의 정교한 제작 시스템이 가진 순기능을 보여줬다. 이는 때로 아이돌 산업 전반에 대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나, 유니크한 캐릭터를 꾸미고 국내외의 실력자를 모아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이들이기에 가능한 ‘케이팝 블록버스터’와 다름없다. 〈Pink Tape〉는 이러한 웰메이드 프로듀싱의 결과이자 순수하게 음악만으로도 앨범 단위의 즐거움을 안긴 야심작이다. 20년 남짓한 한국의 아이돌 음악 역사에서 이 정도로 선명한 시금석이 된 앨범은 그리 많지 않다. 추천곡 ‘첫 사랑니’| 첫사랑의 경험을 사랑니에 빗댄 발상부터 신선했다. 중의적인 가사는 첫사랑의 설렘으로도, 사랑니의 고통으로도 이해가 가능하다. 여기에 노래와 랩, 그리고 그 중간을 유연하게 오가는 멤버들의 가창은 익히 경험한 에프엑스 고유의 스타일이었다. 퍼커션의 변칙적인 사용으로 리드미컬한 재미를 만들면서, 귀에 꽂히는 후렴을 통해 흡수력을 높인 것이 성공 포인트. 실험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과연 에프엑스이기에 가능했던 고품격 댄스팝이다. 정민재/음악평론가 정리/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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