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25 19:14
수정 : 2019.12.26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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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이 영화 <화장>을 찍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백두 번째 구름> 한 장면. 영화사 키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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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다큐 연작 ‘백두 번째 구름’
영화 ‘화장’ 촬영 현장 생생히 담아
1986년 11월 둘째 화요일 오전 11시
쉰 살 감독과 만난 20대의 평론가
뒤통수 얼얼한 깨우침을 얻었고
촬영장 쫓아다니며 새 모습도 봤죠
영화를 찍는 시간과 기다림의 시간
그의 삶은 두 가지 시간밖에 없구나
둘로 나눈 다큐, 촬영에만 5년…
스태프들 향한 헌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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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이 영화 <화장>을 찍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백두 번째 구름> 한 장면. 영화사 키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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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평론가는 ‘임권택 전문가’다. 30년 넘게 임 감독에 대해 말하고 써왔다. <한국영화연구1: 임권택>(1987)을 시작으로 여러 책을 썼고,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에 ‘임권택X102’ 꼭지를 7년째 연재중이다. 급기야 다큐멘터리영화까지 찍었다. 직접 연출한 <녹차의 중력>을 지난달 28일 개봉한 데 이어, 그 후속작이면서도 별도 영화인 <백두 번째 구름>을 26일 개봉한다. 왜 이토록 파고드는 걸까?
“제가 감독님을 처음 뵌 게 1986년 11월 둘째 주 화요일 오전 11시 남산의 찻집 ‘난다랑’에서였어요.” 지난 22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만난 정 평론가는 그날을 정확히 떠올렸다. 새파란 20대 평론가를 마주한 쉰살의 임 감독은 “나한테 뭐 들을 얘기가 있겠어요?” 되물었다. “그땐 그 말씀이 겸양의 뜻인 줄 알았어요. 나중에야 깨달았죠. ‘어린 친구가 내 우여곡절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였다는 걸요.” 이제 예순이 된 정 평론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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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이 영화 <화장>을 찍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백두 번째 구름>을 연출한 정성일 평론가.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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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평론가는 중·고등학생 때부터 ‘시네필’(영화광)이었다. 여러 나라 영화를 즐겨 보면서도 한국 영화만은 자기 기준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싫어했다. 대학생이 된 뒤에야 한국 영화를 알아야겠다는 의무감으로 조금씩 보기 시작했다. 어느 날 휴강 시간에 학교 앞 극장에 가 무작정 영화를 봤다. “한국 영화였어요. 처음엔 별로여서 망했구나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전에 보지 못한 이상한 리듬감으로 흘러가더라고요. 장면이 무척 아름답고 기품 있었어요. 끝나고 무슨 영화인지 보니 임권택 감독의 <족보>였어요. 앞으로 이 감독 영화는 다 보겠다고 결심했죠.”
임 감독 영화를 보면 볼수록 호기심이 불어났다. “영화가 굉장히 아름다운데 책에서 읽은 서구 영화이론으론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이 사람은 어떤 예술가인지 만나고 싶어졌어요.” 그러던 중 한국 영화 감독 총서를 만드는 쪽에서 필자로 참여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김기영·유현목 등 쟁쟁한 감독을 두고 임 감독을 맡겠다고 했다. 그래서 성사된 게 1986년 첫 만남이었다. “감독님의 굴곡진 삶이 한국 근현대사와 그렇게 겹칠 거라곤 미처 몰랐어요. 연좌제가 있던 시절, 부모님이 빨치산이었다는 얘기를 힘겹게 꺼내셨어요. 서울로 올라와 먹고살려고 충무로에 발을 들인 게 오늘로 이어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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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이 영화 <화장>을 찍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백두 번째 구름> 스틸컷. <화장> 주연배우 안성기(왼쪽)와 임권택 감독. 영화사 키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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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터뷰에서 뒤통수를 후려맞는 듯한 깨우침을 얻었다 했다. <길소뜸>(1986)을 보면, 주인공(강신성일)이 옛 연인(김지미)을 만나고 와서 잠자리에 드는 장면이 있다. 눈먼 아내가 묻는다. “당신, 그 여자 만났죠?” “아, 참, 그 사람….” 임 감독은 장면을 끊지 않고 길게 끄는 롱테이크로 이를 찍었다. “책에서 읽은 롱테이크 미학은 인물들 표정을 길게 잡아 교감을 보여주고 어쩌고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아내는 화면에 안 잡히고 남자는 등만 보여요. ‘이걸 롱테이크로 찍은 이유는 뭡니까?’ 물으니 감독님이 그랬어요. ‘한국 사람의 염치죠. 부끄러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 그래서 그렇게 찍었어요.’ 부끄러웠어요. 내가 아는 지식이란 게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나는 영화만 봤지, 영화가 삶을 찍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거예요.”
인터뷰와 비평만으론 충분치 않다고 여긴 그는 촬영 현장도 꾸준히 찾았다. 2002년 <취화선> 현장에서 그는 임 감독의 새로운 면모를 봤다. 모든 스태프를 오케스트라처럼 지휘하면서 매 순간 총체적 결단을 내리는 그 과정을 전하고 싶었다. 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영화로 찍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후 꼬박 10년을 기다려 카메라를 잡은 게 2012년이었다. 금세 마칠 줄 알았는데, 임 감독의 새 영화들이 계속 엎어지는 바람에 결국 촬영만 5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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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이 영화 <화장>을 찍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백두 번째 구름> 한 장면. 영화사 키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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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보니 이분 삶은 영화를 찍는 시간과 영화 찍기를 기다리는 시간밖에 없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이걸 100번 넘게 반복하신 분이니 기다림의 시간 자체가 당신 삶의 절반이요, 영화를 만드는 시간의 일부겠구나 하는 데까지 닿았죠.” 애초 한 편으로 계획했던 영화를, 새 영화를 찍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을 담은 <녹차의 중력>과 임 감독의 백두 번째 영화 <화장> 촬영 현장을 담은 <백두 번째 구름>으로 나눠 완성한 까닭이다.
<백두 번째 구름>을 보면, 일사불란한 ‘임권택 시스템’ 안에서 임 감독이 어떻게 배우·스태프와 교감하고 결단을 내리는지, 세밀한 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 평론가는 “이 영화는 임 감독님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이자 열악한 현장에서 애쓰는 한국 영화 스태프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임 감독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도구상자처럼 꺼내 보는 영화였으면 한다”는 바람도 나타냈다. 그는 영화 개봉 이후 <녹차의 중력>까지 아우르는 ‘관객과의 대화’에도 적극 나설 계획이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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