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08 08:13
수정 : 2019.11.09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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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이창동 감독은 한석규를 주인공으로 신도시 주변으로 밀려난 가족의 이야기 <초록물고기>를 만든다. 이창동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장르의 관습에 갇혔던 기존 한국영화 캐릭터에 새로운 현실성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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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CJ 문화재단 공동기획]
(88) <초록물고기>
감독 이창동(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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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이창동 감독은 한석규를 주인공으로 신도시 주변으로 밀려난 가족의 이야기 <초록물고기>를 만든다. 이창동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장르의 관습에 갇혔던 기존 한국영화 캐릭터에 새로운 현실성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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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은 한석규의 해였다. 그가 출연한 세 편의 영화는 한국영화가 새로워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고 모두 신인 감독의 작품이었다. 장윤현 감독의 <접속>은 신파를 제거한 멜로였다. 송능한 감독의 <넘버3>는 시니컬 코미디였다. 그리고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 범죄 누아르에 삼각관계 멜로가 결합된 이 영화는 한석규를 가장 잘 드러낸 영화였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막동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는 비극적인 젊음의 초상을 그려냈고, 이창동 감독은 특유의 작품 세계를 시작했다. 그는 장르의 관습에 갇혀 있던 종래의 한국영화 캐릭터를 일신하고, 그들에게 ‘현실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초록물고기>는 한 가족의 이야기지만, 신도시 주변으로 밀려난 가족은 흩어져 있다. 제대 후 집으로 돌아온 막동이는 도시의 나이트클럽에서 일하게 되고, 그곳에서 보스인 배태곤(문성근)과 가수인 미애(심혜진)를 만난다. 막동이에게 그들은 아버지이며 연인 같은 존재. 그는 점점 도시의 어둠에 젖어가고, 결국 수순처럼 비극을 맞이한다. <초록물고기>는 정체성의 상실 혹은 혼란을 겪고 있는 청년의 이야기다. 신도시 개발로 고향을 잃은 막동이는 이렇다 할 꿈 없이, 자신이 명확히 어떤 존재인지 모른 채 살아간다. 이 테마는 이창동 감독 초기작 속 남성 캐릭터들에서 반복되며 최근작 <버닝>까지 이어지는데, <초록물고기>의 막동이는 그 원형이다. 그는 결국 잃어버린 순수를 되찾지 못하고, ‘초록물고기’에 대한 추억은 그의 마지막 기억이 된다.
아이러니는 막동이의 죽음 이후 그의 가족은 다시 모여 살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들의 음식점에 우연히 태곤과 미애가 찾아간다. 물론 그들은 서로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하지만, 배태곤은 막동이의 셋째 형(정진영)에게 어디서 본 것 같다며 갸웃거리고, 이내 미애는 숨죽여 오열한다. 피해자 유족이 가해자를 손님으로 만나 대접하며 자주 오시라고 인사하는 장면. 아마도 이 신은 1990년대 한국영화의 엔딩 중 가장 먹먹한 풍경일 것이다.
김형석/영화평론가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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