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31 20:34
수정 : 2019.11.01 10:37
[한국영화 100년 ‘K-무비’의 미래] ②인도네시아
‘세계 15위’ 잠재력 있는 영화 시장
‘설국열차’ ‘기생충’ 등 40여편 배급
잘 짜인 구조·예술·대중성 삼박자
현지 관객·감독에게 주효하게 작용
CGV, 차별화된 ‘컬처플렉스’로
영화 시장 20% 점유하며 급성장
2배 늘린 로컬 작품, 관객 17배로
1919년 10월27일 단성사에서 최초의 한국 영화 <의리적 구토>가 첫선을 보인 지 올해로 꼭 100년. 그동안 한국 영화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한겨레>는 지난 5월부터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작품 100편을 기록하고 소개하는 창간기획 ‘한국영화 100년, 영화 100선’을 연재하고 있으며 유실 영화, 한국 영화 스타들, 북한 영화, 여성 영화 등을 소개하는 기획을 통해 한국 영화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봤다. 이제 한국 영화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진단하는 데서 한걸음 나아가 ‘한국 영화의 미래’를 전망한다. 국내 시장에서 벗어나 아시아, 그리고 영화의 본고장 미국 할리우드까지 진출해 ‘케이(K)무비의 세계화’를 꿈꾸는 한국 영화. 다시 시작되는 100년, 한국 영화는 세계 영화 시장의 변방이 아닌 중심으로 좌표 이동을 할 수 있을까? 두차례 기획을 통해 그 가능성을 짚어본다.
|
지난 9일(현지시각) 저녁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는 씨지브이(CGV) 그랜드인도네시아점에서 한국 영화 <써니>의 리메이크작 <베바스>가 상영된 이후 배우 강소라와 인도네시아 배우, 감독, 스태프, 관객 등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씨지브이 제공
|
“강소라 사랑해~.” “소라 언니 예뻐요.”
지난 9일(현지시각) 저녁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는 씨지브이(CGV) 그랜드인도네시아점 상영관 여기저기서 한국말이 터져 나왔다. 현지 관객들의 외침이었다. 배우 강소라는 짧은 무대 인사를 하고 <베바스>를 함께 봤다. <베바스>는 그의 출연작이 아니다. 그가 주연을 맡은 한국 영화 <써니>를 리메이크한 영화다. 그런데도 관객들은 원작의 주연배우를 알아보고 뜨겁게 환영했다.
<베바스>는 원작의 서사를 유지하면서도 일부 설정을 현지에 맞게 바꿨다. 여고를 남녀공학으로 바꿔 남자 캐릭터를 넣고, 원작의 올드팝 대신 1990년대 인도네시아 히트곡들을 사용했다. 관객들은 영화 내내 박장대소를 했다. 엔딩곡을 따라 부르며 춤추는 관객도 있었다. 강소라도 일어나 함께 춤췄다. 그는 “관객들의 자유로운 리액션이 좋았다. 한국에서 웃음이 터진 대목에서 똑같이 웃음이 터지는 걸 보고 관객 감성은 어느 나라든 비슷하구나 하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베바스>는 할리우드 영화 <조커>와 맞붙는 바람에 초반에 고전했다. 하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개봉 4주차에도 관객이 꾸준히 들어 31일 누적 관객 수 50만명을 넘겼다. 재관람도 많아 노래를 따라 부르는 ‘싱얼롱’ 상영도 시작했다. <써니>와 <베바스>를 모두 봤다는 리비키 모라이스(30)는 “<써니>를 처음 본 뒤로 한국 영화를 즐기게 됐다. 한국 영화에는 생각지도 못한 얘기들이 많은 것 같다. <극한직업>도 리메이크하면 재밌을 것 같다”고 말했다.
|
한국 영화 <써니>의 리메이크작 <베바스>의 한 장면. 씨제이이엔엠 제공
|
■ 동남아에 부는 케이무비 바람
동남아 지역에 한국 영화 바람이 불고 있다. 단순히 한국 영화를 상영하는 걸 넘어 한국 영화사가 현지 영화사와 손잡고 한국 영화를 리메이크하거나 아예 새로운 영화를 만드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의 선두에는 국내 1위 투자·배급사 씨제이이엔엠(CJ ENM)이 있다. 정체된 내수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성장 잠재력이 큰 베트남·타이·인도네시아 세 나라에서 활로를 찾고 있는 것이다. 씨제이이엔엠 영화사업본부의 고경범 해외사업부장은 “이들 나라는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가계 구매력이 늘고 있는데도 1인당 연평균 영화 관람 횟수는 0.5회(2017년 기준)에 그치기 때문에 그만큼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특히 인도네시아는 인구 2억6천만명(세계 4위)의 대국이다. 영화 시장 규모도 3억700만달러(약 3500여억원) 수준으로, 동남아 1위와 세계 15위에 해당한다. 씨제이이엔엠은 2013년 <늑대소년>으로 인도네시아에 처음 진출한 이후 <설국열차> <명량> <기생충> 등 올해까지 40여편의 한국 영화를 배급했다. 2016년부터 투자·제작도 시작해 지금까지 10편을 선보였다. 2017년 <수상한 그녀>를 리메이크한 <스위트 20>은 그해 개봉작 흥행 11위에 올랐고, 같은 해 선보인 공포 영화 <사탄의 숭배자>는 인도네시아 로컬 영화(자국에서 제작한 영화) 흥행 1위를 차지했다. <사탄의 숭배자>를 연출한 조코 안와르 감독이 씨제이와 손잡고 만든 신작 <임페티고>는 최근 개봉 9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현지 영화인들은 한국 영화의 장점으로 잘 짜인 구조와 예술성·대중성의 조화를 든다. <베바스>의 프로듀서인 미라 르스마나 마일스필름 대표는 “인도네시아에도 영화로 만들 만한 지식재산(IP)이 많지만 제대로 각색하는 게 어렵다. 구조가 잘 짜인 한국 영화를 리메이크하면서 배우는 게 있지 않을까 해서 합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베바스>를 연출한 리리 리자 감독은 “한국 영화가 독특한 게, 예술영화 같으면서도 일반 관객을 사로잡는 영화가 많다. 이창동·박찬욱·봉준호 작품이 대표적”이라고 말했다.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스타 감독인 그는 “최근 한국 영화 <악인전>과 <스윙키즈>를 인상 깊게 봤다. 기회가 된다면 <살인의 추억>과 <악인전>을 리메이크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씨지브이(CGV)에서 음악 공연이 열리고 있다. 씨지브이 제공
|
■ 한국 영화 전파기지 극장도 약진
하드웨어라 할 수 있는 극장의 동남아 진출도 활발하다. 씨제이씨지브이(CJ CGV)는 2011년 베트남 현지 1위 극장 체인을 인수하면서 단번에 업계 1위로 출발했다. 7개였던 멀티플렉스를 이제는 78개까지 늘려 지난 9월 기준으로 51% 넘는 시장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씨지브이는 2013년 인도네시아에도 진출했다. 기존 극장 체인 위탁경영으로 시작해 2017년 씨지브이로 브랜드 전환을 마쳤다. 9개였던 멀티플렉스는 이제 63개로 늘었고, 426만명이었던 관객 수는 올해 2천만명 돌파가 확실시되고 있다. 시장의 92%를 차지했던 압도적 1위 업체 ‘시네마 21’과의 격차도 줄여, 현재 20%를 차지하는 2위 업체로서 1위(59%)를 뒤쫓고 있다.
이런 급성장에는 기존 영화관과 차별화된 ‘컬처플렉스’ 개념이 주효했다. 김경태 씨지브이 인도네시아법인장은 “1위 업체처럼 영화만 보여줘서는 승산이 없을 거라 판단하고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설명했다. 극장 로비와 상영관에서 음악 공연을 여는가 하면, 기존 상영관을 허물고 농구, 풋살 등을 할 수 있는 스포츠홀을 만들었다. 지난 26일 씨지브이 에프엑스점 스포츠홀에서 <프로듀스 101> 출신 가수 김소희가 공연하기도 했다. 씨지브이 인도네시아법인의 이정재 부장은 “케이팝 인기도 좋아 극장에 케이팝 댄스 스쿨을 만드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귀띔했다. 지난 11일 씨지브이 에프엑스점에서 만난 브리기타(13)는 “비티에스를 좋아하는데, 씨지브이가 한국 기업인지 미처 몰랐다. 여기는 시설이 깨끗하고 다양한 영화가 있어서 한달에 두번은 온다”고 말했다.
|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씨지브이(CGV) 에프엑스점 스포츠홀에서 사람들이 농구를 하고 있다. 씨지브이 제공
|
씨지브이는 한국 영화와 로컬 영화를 전파하는 구실도 한다. 1위 업체는 틀지 않는 한국 영화를 많이 상영하고, 한국-인도네시아 영화제도 꾸준히 개최해오고 있다. 지난 10~13일 인도네시아 5개 도시에서 열린 제10회 한국-인도네시아 영화제에서는 <나쁜 녀석들: 더 무비> <엑시트> <기생충> 등 최신 한국 영화 15편이 상영됐다. 또 로컬 영화가 성장해야 영화산업 전체가 발전한다는 생각에서 로컬 영화 상영을 두배 넘게 늘렸고, 그 결과 씨지브이 로컬 영화 관객은 17배로 늘었다. 김경태 법인장은 “로컬 영화가 성장하면서 한국 영화와의 교류와 협업도 늘고 있다. 영화 한류를 전파하며 동반 성장에 기여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자카르타/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