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에서 남녀주인공이 입맞춤을 하려는 장면은 사전 검열에서 삭제되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우리나라 영화의 발전사 한 모퉁이에는 가위질하는 어두운 그림자가 늘 따라다녔어요. 만약 검열이 없었다면 한국 영화는 30~50년은 앞서갔을 겁니다. 봉준호 감독이 50년 전에 나왔을 거예요.”(김수용 감독)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영상자료원이 한국영화 100년을 맞아 저장고 속에 잠들어 있던 영화 삭제 장면들을 세상에 꺼내놨다. 일제강점기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영화사 100년간의 검열사를 생생하게 복원한 기획전시 ‘금지된 상상, 억압의 상처-검열을 딛고 선 한국영화 100년’이 29일부터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한국영화박물관에서 열렸다.
이장호 감독의 <어우동>(1985)에선 어우동(이보희 분)이 자신의 벗은 몸에 술을 부어 접대하는 장면이 검열 과정에서 삭제되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눈길을 끄는 것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는 검열 장면들이다.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1956)에서 남녀주인공이 춤을 추다 입맞춤하는 장면부터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1993)의 정사 장면까지 다양한 삭제 장면과 삭제 경위를 밝힌 정부 문서들이 전시에 나왔다. 1961년 제작된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에 대해 당시 내무부 치안국장(현 경찰청장)은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부정하고 절망 속에 방황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실업자, 무산 계급의 반항과 자포자기를 조장케 하여 공산주의적인 혁명이라도 일어나야 하겠다는 인상”이라고 비판했다. 전시회에선 <오발탄>에서 국내 상영 당시엔 삭제됐던 미군이 여성을 희롱하는 장면, 노인이 “가자!”라고 외치는 장면, 아기를 등에 업은 엄마가 목을 맨 장면 등을 볼 수 있다.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에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가자”라고 외치는 장면은 “지나친 현실도피”라는 이유로 삭제됐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1961년 내무부 치안국장(현재 경찰청장)이 영화 <오발탄>에 대한 여론을 당시 문교부 문화국장에게 전달하는 내용의 공문서.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이외에도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에서 삭제된 자전거를 타고 바닷속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장면과 주인공이 “이 세상 모든 것은 가짜 아닌 게 없어”라고 말하는 장면. 김수용 감독의 <도시로 간 처녀>(1981)에서 버스안내양의 옷을 강제로 벗기며 유두가 노출되는 장면과 버스 기사들이 상사의 지시로 동료 기사의 뺨을 때리는 장면 등이 빛을 봤다.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4)에선 자전거를 타고 바닷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장면, 여주인공이 교수에게 학점 조정을 해달라고 매달리는 장면 등이 삭제되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1986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 시기에 접어들어 사유와 삭제 정도는 약해졌지만 검열은 여전히 존재했다. 5·18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이정국 감독의 영화 <부활의 노래>(1990)에선 교도관들이 수감자의 입을 벌려서 억지로 밥을 먹이는 장면과 횃불을 들고 모인 군중 장면,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어 나가는 시민군 장면 등이 지워졌다. 1990년대 이후로는 주로 선정적이거나 잔인한 장면들이 잘려나갔는데, 이번 전시회에선 장선우 감독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의 성관계 장면이나 심형래 감독의 <티라노의 발톱>(1994)에서 팔과 손가락이 잘려서 피가 솟구치는 장면 등을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선 이런 영상들은 별도로 마련한 ‘미성년자 관람 불가’ 공간에서 상영한다.
검열을 당했던 영화감독들의 증언을 담은 영상을 통해 당시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날 오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도시로 간 처녀>와 <허튼소리>(1986)를 만든 김수용 감독은 “그동안 검열로 잘린 필름의 길이가 서울에서 부산을 왔다 갔다 할 정도입니다.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선택해도 될까 말까 한데 그런 식으로 코너에 몰아넣고 영화를 만들어서 (제대로) 되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바람불어 좋은 날>(1980)과 <어우동>(1985)의 이장호 감독은 “영화 속에 ‘영자를 부를까나 순자를 부를까나’라는 해병대 노래가 나왔는데, 당시 (전두환) 대통령 부인 이름과 같다고 ‘순자'를 삭제하라는 거예요. 저는 ‘ㅅ'만 잘라내서 ‘운자’라고 만들었는데, 그렇게만 잘라도 관객들이 알아듣고 웃더라고요. 그 정도로 검열이 난센스였던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 영화 100년의 역사 동안 태어나면서부터 성장까지 계속 얻어맞고 자랐죠. 몹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흙수저의 자수성가 입지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고난을 견뎌낸 것이 지금의 영화 번영을 이뤘습니다”라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3월22일까지. 문의 한국영화박물관 02-3153-2072.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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