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21 17:47
수정 : 2019.10.22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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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미국 개봉에 맞춰 엘에이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는 ‘다송이 자화상’ 작가 후니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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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북치기 박치기’ 비트로 읽을 것
[후니훈, ‘기생충’ 그림 들고 미국행]
‘북치기 박치기’ 래퍼로 유명세
작가로 활동 중 봉준호 감독 만나
“삭발한 곰 한마리 같던 봉 감독
영화서 중요하다며 그림 주문
번호까지 매긴 ‘봉테일’ 피드백에
크레용 던지며 머리 쥐어뜯었죠”
영화 속 ‘다송이 자화상’ 등 31점
내달까지 미 현지 개봉관서 순회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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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미국 개봉에 맞춰 엘에이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는 ‘다송이 자화상’ 작가 후니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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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기생충> 속 ‘다송이 자화상’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고 태국(타이) 휴가 중 부랴부랴 귀국했어요. 사무실에 갔는데, 웬 ‘삭발한 곰 한 마리’가 성큼 들어오더라고요. 하하하. 그게 봉준호 감독님과의 첫 만남이었죠.”
‘봉·준·호’라는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내뱉는 작가 후니훈(정재훈·39)의 입술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의 미국 개봉에 맞춰 엘에이(로스앤젤레스) 전시회를 열고 있는 그를 최근 전시장인 씨지브이 엘에이(CGV LA)에서 마주했다. 후니훈은 “영화 작업 중이 아닐 때 ‘변장’을 하면 아무도 못 알아본다던 봉 감독의 비밀이 ‘삭발’이었다는 사실을 본의 아니게 밝히게 됐다”며 크게 웃었다.
“한국 교민뿐 아니라 미국인도 전시회에 엄청나게 관심을 가져 주시는 게 놀라워요. <기생충>이 이제 막 뉴욕과 엘에이 등에서 선 개봉을 했을 뿐인데도 ‘영화 트레일러에서 그림을 봤다’거나 ‘인터넷에서 그림을 보고 작가가 누군지 궁금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이 그림이 내 그림’이라고 말 못 했던 지난 시간을 다 보상받는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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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니훈 작가가 미국 엘에이에서 전시 중인 또다른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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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번 엘에이 전시는 봉준호 감독이 강력히 권하면서 성사됐다. 그림의 저작권이 봉 감독과 투자배급사인 씨제이이엔엠에 있기에 ‘허락’은 필수였다고. “제작사와 씨제이가 전시를 위해 흔쾌히 그림을 보내주셨어요. 봉 감독님이 전시를 앞두고 보내주신 문자메시지를 정확히 기억해요. ‘다송이의 영혼이 담긴 그림을 많은 사람에게 전달해주면 좋겠다’고 하셨죠.” 그는 ‘다송이 자화상’ 등 <기생충> 속 작품 14점을 비롯해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로 그린 그림까지 모두 31점을 씨지브이 엘에이, 씨지브이 부에나파크, 티시엘(TCL) 차이니스 극장 등 3곳에서 10월11일부터 11월 첫주까지 돌아가며 전시하고 있다. <기생충> 관련 행사 때문에 엘에이를 찾을 봉 감독과는 30일~11월2일 열리는 티시엘 차이니스 극장 전시에서 만날 예정이란다.
지금은 웃으면서 스스로를 ‘다송이 자화상 작가’로 소개하지만, 영화 개봉 전까지 그는 자신을 전혀 드러낼 수 없었다. “이제는 아내가 된 당시 여자친구에게도 영화와 그림의 내용을 비밀로 했어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혼자 중얼중얼하며 몇 개월 동안 처박혀 그림 작업만 할 때는 도망가고 싶은 죄수의 심정이었죠.”
비밀유지보다 힘든 건 봉 감독의 “오케이”를 받는 일이었다. “구체적 설명이 없었어요.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니 침팬지를 형상화한 인간 모습으로 스키조프레니아존을 잘 살려 그려달라’는 게 고작이었죠. 제가 작업을 끝낸 그림을 보내면, 봉 감독님이 1번부터 10번까지 번호를 매겨 피드백을 했어요. ‘이건 예수님 같네요’ 식의 메시지가 계속 오니까 크레용(붓도 아닌 크레용으로 작업함)을 집어 던지며 매일 머리를 쥐어뜯었어요.” 그렇게 넉 달 가까이 작업을 한 9월 말, 봉 감독에게 ‘아, 이 그림 참 좋습니다. 스키조프레니아존도 적절하고, 전체적으로 내용도 좋고…이 그림을 걸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받은 순간 “아톰처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로 솟아오를 것 같은 기분”이었단다. 실제로는 이 메인 그림 말고도 다송이 방에 흩어져 있는 소품 등 영화에 등장하는 후니훈의 그림은 훨씬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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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에스엔에스에 올린 이 그림을 보고 봉준호 감독이 ‘다송이 자화상’을 그려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셨어요.” <기생충> 미국 개봉에 맞춰 엘에이 씨지브이에서 전시회 중인 후니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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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밝은 사람들은 알아봤겠지만, 후니훈은 <기생충>에 단역으로 출연까지 했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달려가는 ‘다송이 생일파티 장면’에서 첼로를 켜고 오페라를 부르는 음악가들 사이에 분홍색 티셔츠를 입고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그다. “사실 제가 명지전문대 장미희 교수님 밑에서 연기를 전공했어요. 그때 교수님이 ‘넌 그냥 조명을 맡아’라고 하실 정도로 연기에 별 재능이 없었는데, 이렇게 출연까지 하니 얼마나 영광스럽던지…. 하하하.”
<기생충> 이전에는 래퍼로 더 잘 알려졌던 후니훈은 “봉 감독님, 그리고 <기생충>과의 만남이 인생의 두번째 변곡점이 됐다”고 했다. 2000년대 초반 ‘북치기 박치기’라는 비트박스로 티브이 광고에 출연하는 등 화제를 모았던 그는 현재 지비지(ZiBEZI)라는 이름의 일러스트레이터로도 활동 중이다. “주변에서 ‘운이 오지게 좋다’고들 해요. 음악도 하고 그림도 하고, 이젠 ‘작가님’ 소리도 들으니 운발 하나는 타고난 게 맞죠. <기생충>은 제 인생에 벌어진 가장 재밌는 일 중 하나예요. 이제 바라는 건 딱 한 가지. <기생충>이 오스카상(아카데미상)마저 들어 올린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은 또 없겠죠? 하하하.”
로스앤젤레스/글·사진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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