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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남동생과 단둘이 사는 소녀가장 히나에게는 국지적이고 짧은 시간 동안 맑은 날씨를 부르는 힘이 있다. 포디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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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날씨의 아이>
어느 날 우연히 사랑에 빠지는
16살·18살 남녀 주인공 통해
청소년 둘러싼 어두운 세상 그려
‘빛 웅덩이’ 등 아름다운 묘사와
인간적 온기·명랑함 돋보이지만
‘다 괜찮을 거야’라는 말로
21세기 청춘을 위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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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남동생과 단둘이 사는 소녀가장 히나에게는 국지적이고 짧은 시간 동안 맑은 날씨를 부르는 힘이 있다. 포디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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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맑은 날이 거의 사라지고 비가 오는 날이 계속된다는, 재해·재난 무비적 설정을 안고 들어가는 <날씨의 아이>. 하지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라는 이름을 아는 관객은, 아니 최소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청춘 판타지 로맨스 <너의 이름은.>(2017)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재난영화를 예상하진 않을 것이다.
일단, 남녀 주인공 ‘호다카’와 ‘히나’는 각각 16살과 18살로, 청춘로맨스의 세계 표준 연령대에 있는 청소년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수많은 도시의 연인들처럼 ‘어느 날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어느 날 우연히’에는 훨씬 큰 의미에서의 필연이 숨어 있다.) 또 고풍스러운 시골 마을의 청소년 무녀였던 <너의 이름은>의 여주인공처럼 <날씨의 아이>의 여주인공 히나는 ‘날씨 무녀’에게 힌트를 얻어 만들어진 ‘초자연적 파워를 지닌 신비소녀’ 캐릭터다. 여주인공이 자연의 신비한 운행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은, 남녀 주인공의 사랑에 우주적 규모와 신화적 신비감을 얹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알리바이다.
하지만 감독의 2013년작 <언어의 정원>에서 일본 고전문학과 정원에 대해, 그리고 <너의 이름은>에서 무녀 의식에 대해 그랬던 것과 달리, <날씨의 아이>에서는 ‘날씨 무녀’가 본격적인 소재로 상세히 묘사되거나 등장하지는 않는다. 시각적으로 등장하는 일본 전통문화는 신사의 문(도리이), 800년 된 천장화, 맑은 날씨를 기원하는 인형(데루테루보즈) 정도다.
대신 신카이 감독은 21세기 판타지로 번안된 ‘날씨 무녀’를 통해서, 지금까지 감독이 본격적으로 발을 들인 적 없었던 새로운 영역으로의 진입을 시도한다. 사회적 발언이라는 영역이다.
<날씨의 아이>에서 감독은 기후변화, 청(소)년 빈곤, 도시 집중화, 희망과 관용 없는 사회 등등 그다지 맑고 투명하고 청초하지 아니한 문제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이는 신카이 마코토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내향적이고 청색 투명한 감수성에 견줘 꽤 튀는 요소인 바, <날씨의 아이>의 가장 큰 관건은 이 두가지 이질적 요소가 얼마나 위화감 없이 공존하는가 또는 균형을 이루는가에 있을 것이다.
‘날씨를 바꾸는 능력’을 쓴 대가는?
남주인공 호다카는 고향인 섬마을에서 가출해 무작정 도쿄로 올라온 고1이다. 그는 우연한 사고(미니 천재지변) 덕분에 만나게 된 영세 편집기획사 사장 ‘스가’의 사무실에서 기숙하게 된다. 그러던 중, “도쿄는 무섭다”를 되뇌며 길 잃은 새끼고양이 신세로 있던 자신을 유일하게 친절하게 대해줬던 18살 도쿄 소녀 히나를, 이미 앞서 말했듯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초등학생 남동생과 단둘이 사는 소녀 가장 히나에게는 국지적이고 짧은 시간 동안이긴 하지만 맑은 날씨를 부르는 힘이 있다. 이른바 ‘100퍼센트 맑음소녀(晴れ女)’인 그 능력으로, 히나 남매와 호다카는 계속해서 비가 내리는 도쿄 곳곳에서 꽤 짭짤한 수입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행운은 오래가지 못해, 호다카는 히나를 만나면서 얽혀든 사건으로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고, 히나는 날씨를 바꾸는 능력을 쓴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 뒤로 이어지는, 도쿄 시내를 누비는 추격 액션에서 기상 관측 100년 역사상 초유의 기상이변, 그리고 천상 세계의 정원을 뛰노는 스펙터클 판타지까지 아우르는 이 영화의 거대 규모 지향적 이야기 전개를 이 자리에서 미주알고주알 적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크게 볼 때 <날씨의 아이>의 전개 양상은 <너의 이름은>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 두 영화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일본 시골의 고풍스럽지만 따뜻한 정취와 도쿄의 번잡하지만 화사한 정취를 교차시켰던 <너의 이름은>과는 달리, <날씨의 아이>의 배경은 끝없이 비 내리는 콘크리트와 강화유리의 계곡인 도쿄다. 그렇다고 <날씨의 아이>가 <너의 이름은>처럼 그 자체만으로도 각종 개그가 쏟아져 나올 법한 코믹 설정을 깔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시골이든 도시든 아무튼 중산층 이상에 속했던 <너의 이름은>의 남녀 주인공과는 달리, <날씨의 아이>의 남녀 주인공은 상당히 궁핍하다. 더구나 경찰의 추격이라든지 냉정한 관료주의 같은 상황들은 이들을 점점 더 막다른 곳으로 몰아가, 선택지를 거의 남겨두지 않는다. 우리의 현실이 약자들에게 항상 그러하듯.
하여 이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은 결국 ‘온 마음을 다해 간절히 빌면 이루어지는 소원’ 같은 동화뿐이다. 요컨대 <날씨의 아이>는 주인공(들)을 제물로, 날씨(=멈추지 않는 비)를 벌로 설정하면서, 벌을 멈추기 위해 제물을 바치는 의식으로 영화를 전개해나간다.
그런데 누구의 어떤 죄에 대한 벌? 그리고 누구에게 바치는 제물? 이 부분에서 영화는 뚜렷한 ‘범인’을 지목하지 않는다. 이는 양날의 칼이다. 물론 영화는 정치 팸플릿도, 정치적 올바름 교육용 동영상도 아니다. 다만, “세상(사실은 도쿄)의 형태를 바꾸어버리는” 자연재해라는 거대한 설정에 비해, 이 영화가 드러내는 인간 존재의 방식이 그 규모에 어울리는 깊이를 보이는지는 의문이다. 청소년 로맨스에서 그런 걸 논하는 건 반칙이긴 하겠지만, 이 정도 규모와 함의를 가진 설정이 결국 초우주적 로맨스를 위한 배경화에 그친다면 좀 허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결과적으로 <날씨의 아이>는 아쉽게도 푹 빠질 수 있는 청소년 로맨스가 되기에는 너무 무겁고, 세상에 대한 힘 있는 발언이 되기에는 너무 가벼운, 애매한 지점에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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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의 아이>의 배경은 끝없이 비 내리는 콘크리트와 강화유리의 계곡인 일본 도쿄다. 포디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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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하기, 빼앗기지 않기, 살아남기
그럼에도 주목되는 것은, 신카이 감독의 개성, 특히 인간적 온기와 명랑함이 크게 희생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기획사 사장 스가와 그의 조력자 ‘나쓰미’는 호다카의 제2의 가족이 되어주면서 팍팍하지만 주눅 들지 않는 명랑코믹 캐릭터의 전형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히나의 초딩 동생인 ‘아마노’의 개그는 영화에 없어서는 안 될 윤활제다.(그가 호다카에게 들려주는 연애 관련 충고는 그중 백미.)
기술적인 면에서도 감독이 <언어의 정원>에서 시도했던 비와 물에 대한 묘사가 더 진화한 버전으로 쏟아져 내린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의 위화감을 최소화한 기술적인 섬세함 역시 진보했다. 특유의 하늘 풍경 묘사와 고공에서 본 도시 전경의 아름다운 묘사도 여전하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는 ‘빛 웅덩이’라는 영화의 핵심 비주얼이 상대적으로 어둡고 거친 이야기를 보상해준다.
그런데 기억해 둘 것은, 현재 신카이 마코토로 대표되는 요소들을 이미 24년 전에 온전히 구현했던 영화가 있다는 사실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각본과 총 콘티를 담당하고도 연출을 맡겼던 곤도 요시후미 감독의 <귀를 기울이면>(스튜디오 지브리 제작, 1995)이다. 곤도 감독이 요절했을 때 미야자키 감독이 “아까운 사람을 잃었다”고 탄식했을 만큼 <귀를 기울이면>이 보여준 관찰력과 감수성은 지금 21세기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다만 24년 전과 달라진 것은 청소년들을 둘러싼 세상이다. <귀를 기울이면>의 남녀 주인공은 자신의 꿈, 진정한 나 찾기, 그를 위한 도전 같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비슷한 또래인 <날씨의 아이>의 남녀 주인공은 탈출하기, 빼앗기지 않기, 살아남기 같은 것들을 이야기한다.(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두 영화는 전혀 다른 영화이고 전혀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되니 이런 단순 비교는 무리일 것이다. 그럼에도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귀를 기울이면>의 주인공들이 했던 꿈이니 진정한 자신 발견하기니 하는 이야기를 지금 21세기에 그대로 한다면 ‘그런 건 금수저들에게나 가능한 럭셔리’라는 냉소만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다 잘될 거야,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라는 영화의 격려와 응원에 흔쾌히 수긍할 수 없었던 것은 그래서였다. 청소년들이 어른들의 못남에 대한 제물로 바쳐질 때마다 언제나 그들을 지키겠다, 그들이 다시는 희생되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어른들이, 정작 그들이 숨 쉬듯 일상적으로 들이켜야만 하는 불평등과 불안, 좌절과 분노를 다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는 주인공들을 밀쳐두고 자신들의 이야기에만 몰두해버리는 현실 앞에서, ‘다 괜찮을 거야’라는 위로는 얼마나 공허한가. 얼마나 서글픈가.
끝없이 내리는 무심한 비에 잠식돼 가는 것은 도쿄라는 도시가 아닌 우리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비는 도쿄에만 내리는 것도 아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제물이 바쳐져야 이 비가 멈출까.
한동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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