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10 10:26
수정 : 2019.10.10 11:23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19) 경마장 가는 길
감독 장선우(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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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유학 시절 J(강수연)와 동거를 했던 R(문성근)는 귀국 후 아내가 살고 있는 고향 대구에 내려가지만 계속해서 J를 잊지 못하고 서울로 출강을 갈 때마다 J를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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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 길>은 프랑스 유학 때 동거했던 남자 R과 여자 J가 한국에 돌아와 벌이는 육욕과 관념의 난장을 다룬다. R보다 일찍 귀국해 자리를 잡은 J에게 R은 한때 동거했던 애인이자 J의 학위논문을 대신 써준 스승으로서 지분을 요구한다. 그들 사이에 오가는 말들은 배배 꼬이고 헛바퀴를 도는 관념들이 그 말들 사이에 똬리를 틀지만 요점은 동침을 원하는 R의 요구를 J가 받아들이느냐 여부다. J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R의 요구를 거부하고 그들의 동침은 다음 기회로 미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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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R(문성근)는 아내(김보연)에게 이혼을 요구하지만 아내는 이를 거부하고 괴로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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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문학평론가로 데뷔해 대학에 자리를 잡은 J는 홀로 서려 하지만 R은 그런 J를 경멸하며 협박한다. R은 J에게 “너는 나, R과의 이당띠떼(동일성)를 포기하는 순간부터 허공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런 R도 사정은 변변치 못하다. 그에게는 자신의 입신양명을 바라며 희생했던 노모와 아내와 자식들이 있다. R은 의무와 보상을 처연하게 바라는 자신의 가족들을 보며 사랑 없는 관계의 인습으로부터 탈출할 것을 바라지만 언감생심 서구에서 단련된 그의 합리적 지성도 자신 앞에 놓인 상식적인 인간의 도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R은 자신의 위선과 무능을 J에게 투사해 화풀이한다. 그는 자신이 써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아 한국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J의 몸부림이 지식인의 합리적 지성을 몰각한 부질없는 짓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는 엄마의 품을 찾는 어린아이처럼 거듭 J의 몸을 갈구하지만 그의 욕구는 번번이 좌절된다.
하일지의 원작 소설에서 육욕에 달뜬 R의 내면은 곧잘 장황하게 서술되고 우스꽝스러운 남녀 주인공의 섹스 게임의 이면에는 서구의 합리적 정신과 한국의 가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희미한 윤곽을 띠지만 장선우의 영화에서 그 모든 것은 가차 없이 거세된다. 말과 행동의 괴리 속에서 R과 J는 위선과 비겁과 무능을 감당하지 못하는 추한 지식인일 뿐이다. 대신 영화는 소설에는 없는 순간들을 곧잘 창조한다. R의 시점으로 화면에는 일상적으로 노동하는 사람들이 자주 비친다. 영화의 말미에 R은 광주리를 이고 가는 아낙네를 버스 창문으로 보며 오열한다. 허공에 뜬 지식인의 정체성은 대지에 굳게 발 딛은 아낙네의 행보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이다.
사회주의 진영 붕괴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유행이 지식인 사회를 강타했을 때 그에 대한 문학적 응대로 나온 하일지의 소설은 장선우의 영화를 통해 거대담론에 대한 부정과 민중을 향한 도저한 애정을 동시에 꾀하는 또 하나의 작품으로 거듭났다.
김영진/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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