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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20 19:17 수정 : 2019.09.20 19:23

우주비행사 로이는 지구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밀 프로젝트를 막기 위해 태양계 끝까지 탐사하는 임무를 맡아 험난한 우주 여정에 나선다. 20세기폭스코리아 제공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애드 아스트라>

생명체 멸종시킬 재앙 막기 위한
극비임무 맡고 긴박한 우주여행
현장감·사실성 돋보이는 SF

인간에 대한 환멸과 분노
아버지에 대한 의심과 공포 속
깨닫게 된 ‘우리의 미래’는

우주비행사 로이는 지구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밀 프로젝트를 막기 위해 태양계 끝까지 탐사하는 임무를 맡아 험난한 우주 여정에 나선다. 20세기폭스코리아 제공
브래드 핏의 <인터스텔라>? 아버지와 딸이라는 관계를 아들과 아버지라는 관계로 바꿔놓은(?)이라는 오해를 안기기 십상인 <애드 아스트라>. 하지만 이 영화에서 떠올릴 수많은 영화들 중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마지막까지 떠올리게 될 영화는 아무래도 <지옥의 묵시록>일 것이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영화는 미 우주사령부가 지상에서 시작해 거의 대기권을 벗어나는 고도까지 건설하던 우주안테나의 유지보수 임무를 수행 중인 주인공 로이 맥브라이드(브래드 핏)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 아찔하고도 장엄한 고공 비주얼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재앙적인 우주입자 해일(catastrophical power surge, 자막에서는 ‘써지’로 표기)이 밀어닥쳐 안테나를 파괴하고, 로이는 지상으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한다.

병상에서 깨어난 그는 우주사령부의 수뇌로부터 ‘생명체를 모두 멸종’시킬 수 있는 이 써지의 발원지인 명왕성으로 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라는 극비명령을 받는다. 그런데 명왕성은 30년 전, 태양계 밖 생명체의 존재를 탐색하기 위해 떠난 아버지 클리퍼드 맥브라이드(토미 리 존스)가 향했던 최종 목적지다.

‘지옥의 묵시록’을 떠올리다

그러니까 로이는 <지옥의 묵시록>의 윌러드 대위(마틴 신)가 그랬듯, 군의 고위층으로부터 극비임무를 부여받고 ‘문명’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지옥의 묵시록>에서는 메콩강의 가장 깊은 상류, <애드 아스트라>에서는 태양계의 최외곽 행성 명왕성) 은둔하고 있는 전설적 인물을 접촉하려는 여정에 오르게 된 것이다. <지옥의 묵시록>처럼 이 여정이 영화의 기본골격을 이루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로이는 이 외롭고 위험한 임무에서 오히려 탈출의 안도감을 얻고, 나아가 구원의 가능성까지도 기대한다. 왜인가. 영화의 도입부에서 안테나 보수작업에 나서는 로이의 내레이션 “나의 시선은 언제나 출구를 향해 있다. (동료를 보며) 나를 만지지 말아줘”에서부터 드러나듯, 로이는 사람과 세상으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두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다시, 왜인가. 이유는 명백하다. 로이는 샌드위치 체인 서브웨이와 디에이치엘(DHL) 간판이 늘어선, 지구의 여느 공항과 크게 다르지 않은 월면우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인간은 어디나 먹어치우지”라며 환멸에 빠진다. 그런 세상에 또 한 명의 인간을 살게 한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아 아이를 낳지도 않았다. 자꾸 안으로만 웅크리려는 그에게 지친 아내 이브(리브 타일러)와의 관계도 거의 진공상태에 가까워져 있다.(실제로 리브 타일러는 영화의 대부분에서 단락적인 이미지로만 등장한다.)

요컨대 그가 느끼는 환멸은 문명의 탐욕에 대한 염증, 그리고 반성도 성찰도 없이 그것을 만들어내길 멈추지 않는 대다수 인간들에 대한 피로감이다. 그것은 <지옥의 묵시록> 윌러드 대위의 내레이션 “이곳(베트남)에서는 교통위반 딱지를 떼듯 사람을 죽인다”에 담긴 환멸과 그대로 통해 있다. 또한 그것은,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전작 <잃어버린 도시 Z>에서 아마존 밀림 한가운데에서 문명을 ‘발견’한 영국인 주인공을 통해 넌지시 던졌던 서양문명 비판, 즉 자신들의 문명만을 문명으로 간주하는 오만, 그리고 다른 문명의 존재 근거 자체(아마존)를 파괴하는 서양문명의 폭력에 대한 규탄을 인간문명 전체로 확장한 것이기도 하다.

하여 영화의 가장 강렬한 ‘액션’ 장면, 즉 로이가 화성행 로켓발사장으로 가던 길에 통과하던 분쟁지대에서 해적 떼의 습격을 받는 장면은 카체이싱-전투액션의 기능성만을 위한 것은 아니겠다. 이 장면을 통해 관객들은 ‘인간이 먹어치운’ 달은 더는 동경이나 낭만의 대상 따위가 아니라 그저 탐욕과 패권의 전쟁터, 즉 지구의 또다른 연장일 뿐이라는 로이의 환멸을 촉각적으로 체감한다. 그것은 화성행 로켓에 오른 로이가 뜻하지 않게 겪게 되는 등골 서늘한 사건(스포일러 우려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 않는다)에서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대한 분노로 확장된다. 더구나 영화는 이 사건에 대한 로이의 언급, 즉 “그 공격은 분노로 가득했고, 나는 그 분노가 이해돼. 나는 그 분노를 아버지에게서 봤고, 그 분노는 내 안에 있기도 해”라는 독백을 통해 로이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 또한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었음을 명확히 드러낸다.

하여 그 이전까지 희미한 암시로만 떠돌던 의심, 즉 로이의 아버지가 ‘인류와 지구생명체 전체를 말살’시킬 수 있는 써지의 배후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점점 형체를 갖춰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러한 의심은 곧 로이의 공포가 된다. 나의 아버지는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인간의 멸종을 바라고 있는 괴물인가? 사람들을 멀리하려는 나 역시 그런 괴물의 씨앗을 품고 있을까? 나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버지를 닮아갈 숙명에 놓여 있는 것일까?

그 공포는 모두가 칭송해 마지않는 ‘원거리 우주 탐험의 전설’인 아버지에 대한 경외감, 그리고 어릴 적 자신과 어머니를 두고 떠나간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뒤섞이면서, 불길한 곰팡이처럼 로이 안에서 팽창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분당 심박수 80을 넘기지 않는’ 침착함과 냉철함(이는 공포로 얼어버려 추락에 아무 대처도 하지 못하는 조종사를 대신해 로켓을 안정적으로 착륙시키는 로이의 모습을 통해 공증된다)으로 정평이 난 로이의 티타늄 합금 같은 껍질 내부의 압력을 점점 높여간다.

이렇게 로이 안에서 시한폭탄처럼 상승하는 내압은, 그의 임무 배후에 숨어 있던 결정적 비밀이 드러나는 화성 장면 이후(즉 영화의 중반 이후)부터 영화의 핵심적인 정서적 추력이 된다. 그 여정의 끝에서 로이가 만나게 될 것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스포일러 우려로 상세한 내용을 말씀드리기는 어렵겠으나, 로이가 목적지에서 얻는 깨달음은 이 영화의 출발점 격인 아서 클라크의 말 “우리가 우주의 유일한 생명체가 아니더라도, 또는 유일한 생명체이더라도, 무섭긴 마찬가지”라는 말로 요약될 수도 있을 것이다.

20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장면마다 실린 현장감과 사실성

그런데 로이가 결말에 이르러 내놓는 일련의 주제 요약형 내레이션들은, 이전까지 차곡차곡 쌓여온 모호함과 그것이 자아낸 질문들의 진중한 호흡에 비해 다소 조급한 느낌이 없지 않다. 비록 그것이 지당하고도 인간적 긍정을 머금은 통찰임은 틀림없지만 말이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로이가 아내 이브를 비롯한 다른 캐릭터들과 가지는 정서적 맥락이 영화 속에서 거의 전달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짐작하시고 계시는 것처럼, 이 영화는 목표지점에 도착하는 목적만을 지닌 직항 항공편은 아니다. <잃어버린 도시 Z>가 그랬던 것처럼, 이 영화의 힘은 한 장면 한 장면 모두에 실려 있는 현장감과 사실성에 있다. 물론 그것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인 시청각적 경험까지는 아닐지도 모른다. <인터스텔라>는 이 영화가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들 중 하나일 뿐이다. 누군가는 도입부에서 갑작스럽게 파괴되는 우주안테나와 속절없이 추락하는 로이의 모습에서 <그래비티>를 떠올릴 것이다. 또 누군가는 로이의 헬멧 안까지 파고드는 내밀한 클로즈업 및 ‘헬멧 속 시점’의 연출에서 <필사의 도전>부터 <퍼스트맨>까지 이어지는 극사실적 우주개발 소재 영화들을 떠올릴 것이다. 한편 거의 언급되지는 않고 있지만 토미 리 존스와 도널드 서덜랜드의 캐스팅을 보고 <스페이스 카우보이>를 떠올리는 관객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월면공항 로비의 서브웨이와 디에이치엘 간판 등, 지극히 세속적으로(즉 자본주의적으로) 묘사된 우주여행 풍경으로부터 <토탈리콜> 같은 영화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모든 영화들에 앞서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는 기본일 것이고.

그러나 이 영화가 상상한 미래는 우리가 머지않아 마주치게 될 미래, 그러니까 우리의 현재가 향하고 있는 각도의 연장선 위에 세심하게 얹혀 있다. 이 공들인 미래 묘사는, 브래드 핏의 단독(!)주연 역량 확인 못지않게 중요한 메인 엔진일 것이다. <애드 아스트라>에서는 예컨대, <미션 투 마스>나 <마션> 같은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비주얼의 화성기지를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영화의 화성에서는 장엄한 붉은 풍광 대신 무미건조하고 갑갑한 지하공간만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살벌하고 황폐하고 건조하고 무자비할수록, 그리고 무엇보다 외로울수록 우리는 이 영화의 목소리를 더욱 뚜렷하게 들을 수 있다. 지금 우리들이 문명이 나아가는 방향과 좌표를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우리뿐이다”나 “살고 사랑하자”(Live and love) 같은 문장만으로는 전달될 수 없는 실물감이다.

한동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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