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9.18 14:13
수정 : 2019.09.18 19:32
영화 ‘양자물리학’ 속 현실사건들
현대 과학의 근간으로 불리지만, 기본 개념인 ‘파동방정식’을 만든 슈뢰딩거조차 끝내 100% 이해하지 못했다는 거창한 이론을 제목으로 단 영화라니. 오는 25일 개봉하는 <양자물리학>은 제목부터 허세가 작렬한다. 에스에프나 공상과학 영화에나 어울릴 법한 포장지에 살짝 기가 죽는다고? 걱정하지 말자. 난해한 포장지를 걷어내고 내용을 요모조모 뜯어보면, <양자물리학>은 지난 10여년 동안 우리가 경험해 온 대한민국의 각종 부조리를 은근히 까발리며 유쾌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화끈한 범죄오락영화일 뿐이다. ‘영화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하지 않나. 미리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양자물리학> 속 현실 사건을 짚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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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버닝썬’ 홍보용 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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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버닝썬 사건
<양자물리학>은 ‘생각이 현실을 만든다’는 인생 모토가 ‘양자물리학적 신념’이라고 주장하면서 살아가는 클럽 사장 ‘이찬우’(박해수)를 주인공으로 한다. 죽어가는 업소도 살리는 ‘유흥업계 화타’인 그는 웨이터에서 출발해 사장까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어느 날 업계 동료가 운영하는 클럽에 방문했다 유명 래퍼 프랙탈(박광선)의 마약 파티를 목격한 이찬우는 오랜 지인인 경찰청 범죄정보과 박기현(김상호) 계장에게 정보를 흘린다. 그러나 단순히 연예인들의 일탈이라고 생각했던 파티 현장은 알고 보니 검찰, 정계, 청와대까지 연결된 엄청난 ‘비리의 종합판’이다.
<양자물리학>은 개봉 전부터 일부 장면을 ‘버닝썬’에서 촬영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화제를 모았다. 실제로 영화 속에는 버닝썬을 대표했던 ‘1억짜리 만수르 세트’가 등장하는 등 버닝썬을 직접적으로 빗댄 장면이 등장한다. 뿐만 아니다. 영화의 큰 틀을 이루는 사건 자체가 아이돌 그룹 빅뱅의 승리가 운영하는 클럽의 ‘폭행 사건과 물뽕 사건’에서 출발해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큰손 YG(양현석), ‘경찰 총경’으로 알려진 청와대 민정수석실 출신 윤모 총경에까지 불똥이 튄 버닝썬 사태와 매우 유사하다. “버닝썬 사태가 벌어지기 이전인 2016년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는 이성태 감독의 말을 고려하면, 그 선견지명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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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수수 혐의를 받고 있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영장실질심사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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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김학의 성접대 사건
이찬우의 지인인 경찰청 범죄정보과 박 계장은 꼬장꼬장한 원칙주의자다. 그는 앞서 ‘고위층 성 접대 사건’을 터뜨리며 승승장구했지만, 성접대 사건의 당사자인 송형석(영화 속에 자세히 드러나지 않으나 법조계 고위 인사로 추정됨)이 밀었던 조문익 지검장이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영전’하면서 물을 먹게 된다.
영화 속에 짧게 언급되는 이 사건은 지난 2013년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법무부 차관에 올랐던 김학의 성접대 사건과 닮은꼴이다. 그가 법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자마자 강원도 원주시의 한 별장에서 촬영됐다는 낯 뜨거운 동영상이 입수된다. 건설업자 윤중천이 권력자들에게 성접대를 했다는 의혹을 수사하던 경찰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한 여성으로부터 “김학의 차관을 접대했다”는 진술을 확보한다. 그러나 2013년 첫 수사와 2015년 재수사에서 수사팀이 잇달아 김 전 차관을 무혐의 처분하면서 부실수사 논란이 일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 대검찰청 과거사진상조사위가 발족하면서 이 사건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고, 결국 김 전 차관은 뇌물수수와 성 접대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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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현장 식당 비리'에 연루된 강희락 전 경찰청장이 조사를 받기 위해 검찰에 출두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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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경찰 함바 비리
청와대에 입성하고 싶은 권력욕에 몸부림치는 양윤식 검사(이창훈)는 마약 사건에 연루된 비선 실세 백영감의 아들을 비호한다. 사건을 파헤치려는 박 계장에게 누명을 씌워 소환한 양 검사는 “버텨봐야 소용없다. 함바 비리 때처럼 경찰 윗대가리부터 줄줄이 옷 벗겨줄까?”라고 호통을 치며 박 계장을 윽박지른다. 몇몇 장면에 검-경의 대립을 내비치거나 검찰의 직접수사권을 비판하는 등 ‘검경수사권 조정’ 갈등의 단면을 드러내는 것 역시 감독이 의도적으로 배치한 장치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지난 2011년 과거 검경 수사권 조정 논의 당시 경찰은 검찰의 함바(공사장 밥집)비리 수사로 곤욕을 치렀고, 이로 인해 경찰의 숙원이었던 수사권 조정 동력도 시들어버렸다. 함바비리는 2010년 함바 브로커 유상봉씨가 정관계 유력인사들에게 공사 현장 민원과 경찰관 인사 청탁 등의 명목으로 뇌물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불거진 사건이다. ‘함바 게이트’로 불린 이 사건으로 강희락 전 경찰청장이 유씨로부터 1억9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았으며, 장수만 전 방위사업청장과 최영 전 강원랜드 사장, 배건기 전 청와대 감찰팀장 등도 연루돼 재판에 넘겨졌고, 임상규 순천대 총장(전 농림부 장관)의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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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복폭행 혐의로 구속기소된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병치료를 위한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은 뒤 휠체어로 이동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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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④한화 김승현 회장 보복 폭행
이찬우와 경찰인 박 계장이 가까워진 계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대기업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이 언급된다. 이찬우가 북창동 클럽 웨이터로 일하던 시절, 그 바닥에 짜~했던 ‘회장님의 보복 폭행’ 소문을 박 계장에게 제보했던 것. 일개 웨이터였지만 정의감을 가진 이찬우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일화임과 동시에 박 계장의 수사 실력을 드러내는 장치랄까.
이는 한화 김승현 회장의 차남이 2007년 청담동 가라오케에서 북창동 한 클럽 종업원 일행과 시비가 붙어 상처를 입자 이를 안 김승연 회장이 경호원 등을 동원해 해당 종업원 4명을 청계산으로 끌고 가 폭행했던 사건이다. 아들을 대신해 대기업 회장인 아버지가 이른바 ‘보복 폭행’을 가한 이 사건은 실제 그 일대 클럽 종업원들 사이의 입소문과 제보를 통해 언론에 처음 보도가 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구치소가 아니라 병원에서 지내며 재판을 받았던 김승현 회장은 “부정에 의한 우발적 폭행”을 이유로 고작 집행유예 3년과 200시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받고 풀려났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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