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9.04 08:43
수정 : 2019.09.04 13:31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56)상계동 올림픽
감독 김동원(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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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올림픽을 앞두고 정부는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용역 깡패와 전투경찰을 앞세워 상계동 달동네 철거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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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영화 운동을 표방한 독립영화 초기엔 외연적으로 극·실험영화가 주류였고 8㎜, 16㎜ 필름을 기반으로 전개되었다. 형식상 특성에 따라 이러한 작품을 만든 그룹이 영화적인 것에 천착하였다면, 운동성을 좀 더 중시하였던 이들은 비디오에 주목했다. 현장 기록의 기동성, 편집과 상영의 용이성으로 비디오는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이후 급속히 수용됐다. 이러한 흐름에서 독보적 위치에 있는 작품이 바로 <상계동 올림픽>(1988)이다.
88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가난한 서민의 동네가 강제 철거된다. 달동네는 산업화 전략의 산물이었지만, 내몰린 세입자를 위한 주거 정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김동원 감독은 철거민과 함께 생활하던 정일우 신부로부터 재판 증거용 자료를 촬영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도 없이 현장에 도착한다. 그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카메라는 거대한 폭력에 맞서는 절박한 몸짓 앞에서 새롭게 각성한다. 철거 현장을 시급히 알려야 한다는 사명으로 <상계동 철거> 1부와 2부가 만들어졌고 교회와 단체를 중심으로 퍼져나간다. <상계동 올림픽>은 후속작 격으로 86년 상계동에서 쫓겨난 주민들이 87년 명동성당 농성을 거쳐 88년 부천에 정착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의 카메라는 시종일관 편파적이다. 주민의 편에서 공권력과 맞서고 주민의 가까이에서 일상을 다정하게 담아낸다. 감독은 그로부터 5년을 상계동 철거민과 동고동락한다. 생활과 시간에 비례해 카메라는 더욱 특별하게 대상에 다가선다. <상계동 올림픽> 이후 연출자가 맺는 카메라와 대상의 관계는 독립다큐멘터리에 빛나는 지표가 되어 후배 영화인들에게 계승된다.
김동원 감독은 푸른영상을 설립해 공동체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작품을 선보이며 다큐멘터리 제작의 1인 시스템을 정착시켰을 뿐만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위한 실천적 독립영화 운동의 구심이 된다. <상계동 올림픽>은 90년대 활발한 역량을 펼치는 한국 독립다큐 운동의 출발점에 있으며 사회에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독립영화 정신의 정수를 품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김동현/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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