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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16 19:17 수정 : 2019.08.16 19:19

가정불화와 주거 불안이라는 어른들의 문제에 행복을 침공당한 하나와, 유진·유미 자매(왼쪽부터)는 서로의 집을 구하기 위해 어른들 몰래 여행을 떠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우리집>

엄마·아빠 불화에 맞서는 하나
집주인 횡포 맞서는 유진·유미
‘우리집 구하기’ 위한 여행 떠나

“내가 지킬게. 우리집도 너희집도”
어른들은 다른 선택을 하게 될까?
전작 ‘우리들’ 이어 마음 흔드는 울림

가정불화와 주거 불안이라는 어른들의 문제에 행복을 침공당한 하나와, 유진·유미 자매(왼쪽부터)는 서로의 집을 구하기 위해 어른들 몰래 여행을 떠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한 글자만 다른 제목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우리집>은 윤가은 감독의 전작이자 데뷔작인 <우리들>과 이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첫 장면부터 그렇다. <우리들>이 그랬듯 <우리집> 역시 어떤 상황 안에 던져진 아이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들>의 주인공 ‘선’(최수인)이 그랬듯, <우리집>의 주인공 ‘하나’(김나연)도 이 상황의 주인공이 아니다. 아이는 상황의 바깥으로 밀려나 있거나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액자와 그림을 서로 뒤바꾸는 것. 그것이 <우리들>에 이어 <우리집>에서도 고수되는 시선이다. 언뜻 전작과 똑같아 보이는 이 도입부는, 하지만, 전작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주인공 ‘선’이 그녀를 따돌리는 친구들 사이에 던져져 있었던 것과는 달리 <우리집>의 주인공 ‘하나’는 부모가 한창 벌이고 있는 치열한 전투의 한가운데에 던져져 있다. 다시 말해 ‘하나’는 아이들의 세계가 아닌 어른들의 세계, 즉 ‘외계’에 던져졌다. <우리들>이 아이들의 세계 안에서 벌어진 세계대전이었다면, <우리집>은 아이들의 세계가 외계와 벌이는 우주전쟁인 것이다.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지만

외계인들은 아이들이 사는 세계를 참으로 쉽고도 간단하게 침략하고 흔들어대고 날려버린다. 그들이 쓰는 무기는 레이저포와 광자어뢰가 아니라 ‘부동산 임대차법’이나 ‘집주인의 우월적 지위’ ‘육아 부담과 상대적 박탈감’처럼 아이들에게는 보이지도,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들이다. 물론 이 외계침공은 어른들도 얼마든지 경험하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어떻게 해야 그런 일을 피하거나 막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아이들의 경험은 어른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아이는 어른보다 행복하고, 또 동시에 어른보다 불행하다.

영화가 집중하는 쪽은 행복 쪽이다. ‘하나’가 맞서야 할 가장 시급한 외계침략은 엄마·아빠의 불화다. 엄마와 아빠는 이미 각방을 쓰기 시작했고 이혼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행복한 가족의 모습은 다들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족은 제각각’이라는 톨스토이 대인의 말씀은, 적어도 이 가족한테는 적용되지 않아, 하나의 엄마·아빠는 오래될수록 점점 세밀해지고도 치졸해지는 부부싸움의 일반적 양상을 그대로 따른다. 이들은 심지어는 설거지를 한 횟수를 두고도 싸운다.

아이는 자신의 설거지와 요리로 그 파국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가 ‘행복’한 것은 그런 면에서다. 하나는 그녀의 오빠 ‘찬’(안지호)의 대사 “네가 뭘 알겠냐”로 요약되는 이 행복 속으로, 우연히 만난 동네 동생 ‘유미’(김시아)와 ‘유진’(주예림) 자매를 데리고 들어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내가 지킬 거야. 우리 집도 너희 집도.”

그런데 지키다니. 무엇으로부터? 다세대주택 옥탑집에 사는 유미 자매를 공격하는 외계인은 우리가 흔히 ‘주거 불안’이라는 용어 한마디로 퉁 쳐 말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 외계인은 주로 집주인 아줌마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외계인은 종종 부동산 아저씨와 집 구경 하는 사람이라는 외계인 지원부대를 대동한 채, 멀리 ‘바닷가 큰 호텔’에 일하러 나간 엄마·아빠가 없는 집을 수시로 침공한다. 그 길지 않은 인생에 “여섯번, 일곱번 정도?” 이사를 한 열살 유진은, 방울토마토가 열리는 화분 마당이 있고 맘껏 물놀이할 수 있는 자신의 옥탑집을 떠나는 것, 더구나 요리 잘하고 자신들을 친동생처럼 챙겨주는 착한 언니와 또다시 헤어지는 것이 최고의 공포다.(하나는 학교에서 주는 선행상 수상에 빛나는 ‘공인’ 착한 아이다.) 그리고 착한 언니는 그들의 집을 지켜주겠다고 자신만만하게 공언했다.

그런데 “어떻게?” 당연한 유진의 질문에 ‘아직은’ 행복한 열두살 하나는 이렇게 답한다. “뭐든 하다 보면 되지 않을까? 뭐든…. 하나하나 쌓는 것처럼.”

그렇게 세 아이는 외계침공에 맞서 서로의 집 지켜주기 연합작전에 돌입한다. 그 귀엽고도 눈물겨운 전투기록을 굳이 이 자리에 미주알고주알 적음으로써 여러분의 즐거움을 망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미 외계인으로의 삶을 충분히 오래 영위해온 우리 성인들로서는 이 싸움이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다.(이하 한 단락 스포일러 경고)

하여 그 싸움은 우리집을 구하기 위한 세 아이만의 여행이라는 최후의 결전으로 귀결된다. <기쿠지로의 여름>을 언뜻 떠올리게 하는 이 여행은, 추억 외에는 아무것도 얻은 것 없는 제자리걸음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여행은 사실, 일종의 본의 아닌 복수이기도 하다. 아이는 부모의 이혼이 자신에게 경험시킬 가족의 갑작스러운 ‘실종’과 그 고통을 엄마·아빠에게 경험시킨다. 영화에서 묘사되지 않아 더욱 생생한 그 경험 뒤, 엄마·아빠는 자신들 앞에 다시 나타난 아이를 마주하게 된다. 자신들이 이혼을 얘기할 때와 똑같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타난 아이를. 이 경험으로 어른들은 다른 선택을 하게 될까? 아니면 이 역시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의 새총으로 우주모함 공격하기에 지나지 않을까?

영화는 답을 내리지 않지만, 어쨌든 영화는 아이들의 싸움이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설픈 해피엔딩으로 얼버무리는 우를 범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 귀여운 판타지는, 그저 웃는 얼굴을 하는 패배주의일까?

하지만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이기는 싸움’들이란, 그 아래에 수없이 많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안다. ‘뭐든’ 함으로써 어떻게든 자신들의 소망을 이루려는 그 마음으로 상자들을 쌓아 올려 만든 아이들의 모형집이 그렇듯. 이 영화가 귀엽고도 허망한 한여름 밤의 추억과 일탈로만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세 아이가 재활용품을 써서 만든 모형집은 영화 포스터로 쓰일 만큼 <우리집>의 중심을 이루는 오브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다소 인위적인 설정들 아쉬워

물론 아쉬움도 적잖이 남는다. ‘시가 깊어지면 소설이 되고, 소설이 깊어지면 시가 된다’는 문학계의 경구를 ‘극영화가 깊어지면 다큐멘터리가 되고, 다큐멘터리가 깊어지면 극영화가 된다’로 슬쩍 바꿔보는 것이 허락된다면, <우리집>은 <우리들>이 도달해낸 다큐멘터리적 경지로부터 꽤 멀어져 있다. 대신 창작자의 의도와 손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들(예컨대 전날 유진·유미 자매와의 즐거운 추억으로 웃음을 머금고 잠든 하나의 표정이, 다른 방에서 들려오는 엄마·아빠의 다툼으로 점점 굳은 표정으로 바뀐다든가)이 종종 눈에 밟힌다.

전작 <우리들>을 본 관객들에게 그러한 손길은 특히나 더 생생하게 느껴질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 <우리집>은 다세대주택이 밀집한 서울 어딘가라는 배경에서, 여름과 여름방학과 바다 여행, 한 아이와 두 남매(또는 자매) 같은 인물 구성에까지, 전작 <우리들>의 많은 부분을 거의 그대로 다시 가져와 변주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 대표적으로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지그재그 3부작’ 같은 작품을 떠올려본다면, 그러한 변주 자체는 큰 강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작과의 연관성을 지나치게 의식한 듯 보이는 <우리집>의 경우, 변주가 내는 효과는 아쉽게도 내용보다 틀이 두드러져 보이도록 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

이는 틀에서뿐만이 아니라 내용에서도 적용되는 이야기일 텐데, 특히 영화 포스터에 쓰일 만큼 영화의 중심을 이루는 오브제인 모형집(아이들이 재활용품을 써서 만든 것이다)이나 하나의 요리책 같은 오브제들은 상징이라고 하기엔 그 쓰임새가 지나치게 노골적이면서도 설명적이다. 덕분에, 예컨대 <우리들>에서 ‘선’이 만든 끈팔찌가 끌어낸 자연스러운 울림은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아쉬움에도 영화 말미, 하나와 유진·유미 자매가 헤어질 때 주고받는 한마디는, <우리들>의 결정적 대사인 “그럼 언제 놀아?”가 그랬듯, 관객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하다. 그 진동은 물론 영화가 그 전까지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것들로 만들어진 것임은 물론인데, 담담하면서도 오랫동안 휘발되지 않는 울림을 점점 만나기 어려워지는 현재 우리의 영화 환경에서 <우리들>과 <우리집> 같은 작품들의 존재는 그래서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윤가은 감독의 다음 작품이 여전히 기대되는 것은 그래서이다. 그 기대가 ‘우리 3부작의 완결편’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한동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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