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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1 07:13 수정 : 2019.08.15 15:54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40)맨발의 청춘
감독 김기덕(1964년)

한국전쟁 때 고아가 된 건달 두수(신성일)와 외교관 딸인 요안나(엄앵란)는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이 토요일 서울시내에서 데이트를 하는 모습.
한국 청춘영화의 효시라 불리는 <맨발의 청춘>(1964)은 서울 관객 25만명을 동원한 당대 최고의 흥행작이다. 당시 서울 인구가 250만명가량이었음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성공이었다. 영화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가 시대적 배경이다. 다방과 재즈와 같은 새로운 문화를 소비하는 젊은 세대의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불우한 가족사를 지닌 고아 건달이 필연적으로 맞이하는 파국이라는 설정은, 당대 청년세대의 억눌린 감정을 대변했다. 세상은 분명 달라지고 있었으되 과거의 기억은 여전히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김기덕 감독은 앞서 전쟁영화의 효시라 할 수 있는 <5인의 해병>(1961)으로 제1회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하고 흥행에서도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이처럼 한국영화계에서 개별 장르의 원조쯤 되는 <맨발의 청춘>과 <5인의 해병> 외에도 멜로드라마 <타인들>(1967), 공상과학(SF)영화 <대괴수 용가리>(1967) 등을 성공시키면서 당대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떠올랐을 뿐 아니라 언제나 굵직한 장르적 여정을 보여주면서 한국영화의 스펙트럼을 몇뼘 더 넓혔다. 19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지탱한 주축 감독들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맨발의 청춘>은 당시 외교관의 딸과 야쿠자 청년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일본영화 나카히라 고 감독의 <진흙투성이의 순정>(1963)을 표절한 혐의를 벗어던지지 못했다. 일본과 국교를 맺기 전 표절에 대한 인식 또한 희미했던 시절, 여러 한국영화가 그렇게 일본영화를 끌어왔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순신 동상(1968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세워졌다)이 세워지기도 전인 을씨년스러운 광화문의 모습, 사회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궁핍 등 <맨발의 청춘>만이 보여주는 시대의 풍경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비극의 정서적 울림은 함부로 폄하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후 실제 결혼에 이르게 되는 신성일과 엄앵란 두 배우의 존재감에 더해 ‘맨발의 청춘’이라는 제목만으로도 당시 한국영화의 어떤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다.

주성철/<씨네21>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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