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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24 11:47 수정 : 2019.06.24 21:24

영화 <행복한 라짜로>의 한 장면. (주)슈아픽처스 제공

칸 국제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성경 속 인물 빌려온 ‘현대인을 위한 우화’
‘무엇이 진보인가’ 묵직한 물음 던져

영화 <행복한 라짜로>의 한 장면. (주)슈아픽처스 제공
영화 <행복한 라짜로>(상영 중)는 성경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한 ‘현대인을 위한 우화’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인 ‘라짜로’부터 ‘요한복음’ 속 ‘믿음을 통한 부활’을 상징하는 ‘나사로 이야기’에서 따왔다.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은 이 작품으로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 각본상을 거머쥐었다.

외부와 단절된 이탈리아의 외딴 마을 인비올레타. 50여명의 소작농이 알폰시나 데 루나 후작 부인의 담배 농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린다. 전구가 없어 마음대로 전기조차 쓰지 못하고, 열댓 명이 한 방에서 살을 맞대고 기거한다. 아이들도 학교 문턱조차 밟지 못한 채 착취를 당한다. 착하고 순수한 청년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도 이들 중 한 명이다. 후작 부인이 마을 사람들을 착취한다면, 마을 사람들은 라짜로를 착취한다. “라짜로, 이 상자를 옮겨라”, “라짜로, 할머니를 방으로 모셔라”, “라짜로, 나 대신 닭장을 좀 지켜라”….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라짜로”를 불러대지만, 그는 불평불만 없이 늘 웃음으로 궂은 요구를 들어준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의 한 장면. (주)슈아픽처스 제공
그러던 어느 날 후작부인과 그의 아들 탄크레디(루카 치코바니)가 요양차 마을을 찾는다. 탄크레디는 가짜 납치극을 꾸며 마을을 벗어나려 하고, 라짜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라짜로가 비를 맞고 열병을 앓는 사이 납치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후작 부인이 무지한 마을 사람을 속여 노예처럼 부렸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대 사기극’을 깨달은 마을 사람들은 도시로 나가 뿔뿔이 흩어진다.

영화는 이후부터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다. 탄크레디를 찾아 나섰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라짜로가 깨어나자 시간은 수십 년이 흐른 뒤다. 변함없는 모습을 간직한 순수한 라짜로는 걸어서 도시로 나아가 마을 사람들과 한 명씩 한 명씩 재회하게 된다.

마치 타임슬립 영화처럼 느껴지겠지만,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은 ‘마술적 리얼리즘’의 기법을 꺼내 들며 이 묘한 판타지 속에서 현실에 대한 통찰의 밀도를 더욱 높인다. 후작 부인의 손아귀를 벗어나 도시로 갔지만 마을 사람들의 삶은 달라진 것이 없다. 자본주의의 맹렬한 공세 속에서 그들은 여전히 초라하고 남루하다. 먹고 살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자를 착취하며, 속이고, 사기를 친다. 귀족 계급으로부터의 착취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의 착취로 바뀌었을 뿐, 그 본질은 그대로인 셈이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의 한 장면. (주)슈아픽처스 제공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은 흔히 ‘진보’라 일컫는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과연 진정으로 인간의 삶이 나아졌는가, 그저 물질의 암흑기에서 인간의 암흑기로 자연스레 이행한 것은 아닌가를 묻는다. 이런 의미에서 라짜로의 시간 여행 역시 역사 속에서 흔히 반복되는 모순과 불합리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시에서도 여전히 피폐한 소작농들은 심지어 과거, 즉 인비올레타 시절로의 회귀를 꿈꾼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무력한 라짜로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영화 속 라짜로는 선하지만 현실의 그 무엇도 바꾸지 못한다. 감독은 “우리는 성자들이 무릇 힘과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고 세상일에 간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신성함이 카리스마는 아니라고 믿는다. 오늘날 성자가 현대의 삶 속에 나타난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그를 내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 세상은 어쩌면 성자를 필요로하지도 않고, 성자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그런 곳으로 변한 지 오래가 아닐까? 다 보고 나면 ‘행복한 라짜로’라는 반어적 제목의 여운이 긴 꼬리를 드리우는 작품이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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