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호 사회학자-손성은 정신과 전문의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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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후 `기생충이 남긴 것들'을 주제로 대담을 하기 위해 서울 마포구 한겨레 사옥을 찾은 손성은 정신과 전문의(왼쪽)와 김찬호 사회학자가 영화 <기생충> 포스터를 패러디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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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100년 역사상 최초로 칸 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감독 봉준호)은 올 상반기 최고의 화제작이다. 21일 기준으로 870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으며 2019년 현재 전체 박스오피스 3위(한국영화 2위)에 올라 흥행에 성공했으며, “계급 탐구의 명작”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한국은 물론 전 세계 평단을 사로잡았다.
<기생충>에 대한 우리 사회의 뜨거운 관심은 ‘칸 수상의 후광’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이 영화가 한국을 넘어 전 지구적인 문제로 떠오른 ‘빈부 격차’의 문제를 정면으로 겨냥하면서도 이러한 무거운 주제의식을 다양한 장르의 변주를 통해 풀어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공통적으로 “재미있는 불쾌감”을 호소하는 것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한겨레>는 <기생충>이 영화계를 넘어 우리 사회에 남긴 것들이 과연 무엇인지 짚어보기 위해 김찬호 사회학자(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와 손성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초청해 대담을 마련했다. 대담은 지난 18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진행됐다.
사회 영화의 텍스트적 분석은 이미 많이 진행됐기 때문에 오늘은 이 영화가 우리 사회에 던진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질문’에 집중해 보면 좋겠다. 이 영화에 대해 “재밌지만 불편하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 왜일까?
손성은(이하 손) 이 영화의 특이점은 ‘선악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데 있다. 비슷한 소재를 다뤘던 봉 감독의 전작 <설국열차>와 비교해 보면 <기생충>에는 ‘부자는 핍박하는 자, 가난한 자는 핍박받는 자’라는 명확한 직선 구도가 아니라, 되레 부자인 박사장네는 순진하고 착해서 이용당하고, 가난한 기택네는 이들을 속인다.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뒤섞이는 원형적인 구도이다. 관객들도 어느 한 편에만 감정이입을 하지 않게 된다.
김찬호(이하 김) 우리 사회 대부분은 영화 속 두 가족 중 어느 쪽도 아닌 경우가 많다. 양 극단에 놓인 두 집을 설정했는데, 가구 통계상 36만여 가구(전체의 1.9%)가 반지하에 산다고는 하지만 이 작품은 극단적인 두 부류의 사람들이 일상에서 몸으로 만날 때 벌어지는 상황을 우화적으로 통찰할 뿐 한쪽에만 감정이입을 하도록 유도하지 않는다.
손 기택네도 원래부터 하층민은 아니었다. ‘대만 카스텔라 사업’을 했던 자영업 사장님이었고, 아들 기우는 4수를 했고, 딸인 기정은 미대 입시를 준비했다. 뭔가 상위계급으로 가기 위해 경제적·교육적 노력과 투자를 하던 중산층이었다.
손성은 “선악 없어 공감 주체가 수시로 변화…‘선’ 침범 받을 때 모멸·분노
이기심과 욕망이 우리 안의 기생충, 타인은 배척 아닌 공생하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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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은 정신과 전문의.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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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극빈층은 대부분 무기력·알코올·폭력 등이 만연한데, 기택네 집은 그렇지는 않다. 민혁이 같은 부잣집 친구를 둘 만큼 사회적 자본이 있고, 박사장네 식구들을 꾈 매력 자본도 있다. 삶에 대한 의욕도 높은 편이다. 전형적으로 계단에서 미끄러진 몰락한 집안이지.
손 공감의 방향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며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셈인데, 박사장이 기택에 풍기는 냄새에 대해 “가끔 지하철 타면 나는 냄새”라고 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갑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매일 타고 다니는 지하철에서 내가 풍겼을 냄새와 맡았던 타인의 냄새를 기억으로 더듬게 된다.
김 기택네에 대한 그런 공감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영화의 결말을 생각해보자. ‘살인’에 가담한 기택네 가족 중 누구도 감옥에 수감되지 않는다. 법적 정의는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이 영화가 재밌는 것이 관객이 기택네와 공범의식을 가지다가 ‘살인’에 이르면 섬뜩해져서 멈칫하게 되고, 일정한 거리를 또 두게 된다는 점이다.
사회 ‘냄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영화 속 ‘냄새’가 던지는 화두는 무엇일까?
김 영화 속 냄새는 ‘가난의 분비물’을 상징한다. 기우를 비롯한 기택네 가족이 정교하게 계획을 짰지만, 놓친 것이 바로 냄새다. 악취가 운명처럼 따라다니는 존재들로 그려진다. 그에 반해 문광이나 첫번째 운전기사는 부자들과 함께 살면서 자연스럽게 ‘탈취된 존재’가 된 듯하다. 냄새는 또한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는데, 김치 냄새, 치즈 냄새처럼 인종이나 문화, 혹은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차별로도 연결될 수 있다.
손 인간의 여러 감각 중 후각은 원초적이다. 위험을 감지할 때, 상한 음식을 구별해 낼 때, 내 편과 적을 구분할 때. 그런데 내 아이 똥 냄새나 사랑하는 사람 몸에서 나는 땀 냄새는 이질감이나 혐오감이 들기보다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제거해야 할 적이냐 내 편이냐에 따라 나쁜 냄새도 느껴지지 않거나 참아내기 쉽다. 유일하게 박 사장네 가족 중 다혜만이 기택네 냄새를 느끼지 못한다. 다혜는 기우와 키스하고, 피 냄새 낭자한 기우를 둘러업고 뛴다. 타인의 냄새를 못 참는 것은 나와 연결돼선 안 되는 남이라고 생각해서다.
사회 결국 냄새는 ‘선을 넘는다’는 표현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는 듯하다.
손 사람들 사이에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 즉 선이 있다. 이 선이 침범받을 때 모멸감과 분노를 느낀다. 사람들 몸쪽 가까이 있는 이 안쪽 선을 넘지 않게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되, 지나치게 남을 판단하고 구별 지으며 밀어내는 과도한 바깥선 긋기는 자제해야 한다.
김 그 선을 넘는다는 것에 관한 기준도 결국 권력에 의해 그어질 때가 많다. 영화 속 박사장이 계속 “선을 넘을 듯 말듯”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가진 자들이 오히려 선을 넘을 때가 많은데,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갑질’이 아닌가? 또 바로 옆 단지 임대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구별 짓는 행위 같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사회 구분 짓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니 영화 속 ‘을’(기택네)과 ‘을’(문광네)의 싸움이 언뜻 떠오른다.
손 영화 속 문광이 충숙에게 “불우이웃끼리 서로 돕자”고 하자 “나 불우 아니야”라고 한다. 바로 이게 을끼리의 선 긋기다. 기택네와 문광네 비극은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잔인함에서 비롯됐다. 을이 갑의 계급에 올라가도 잔인한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돌고 도는 분노와 갑질은 계속될 것이다.
김 자신도 을이면서 ‘나는 최소한 쟤네랑은 달라’라고 하면서 갑 행세를 하는 이들이 있다. 같은 노동자이면서도 정규직들이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현상을 생각해보자. 어떤 노조에서 체육대회를 하는데 “정규직은 축구를 하고 비정규직은 족구를 한다”고 하더라. 사실 이 프레임에 갇히면 사회적 연대나 동맹이 안 된다. 박 사장네에 ‘기생’하기 위해 기택네가 문광과 근세를 가혹하게 대하는 것도 일종의 이런 의식일 수 있다.
손 영화 사이 사이에 인간적인 배려가 보이는 대목도 있다. 기택이 해고된 기사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을 비칠 때, 기정이가 밥도 못 먹었을 문광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며 대화를 해 보려 할 때다. 결국 파국을 막는 것은 두렵고 살기 바빠도 작은 공감과 따뜻한 마음을 내려는 시도 아닐까.
김찬호 “영화속 냄새는 ‘가난의 분비물’, 가진 자들이 선을 넘을 때는 ‘갑질’
인간 존엄 훼손되는 순간 모든게 끝…‘나와 타인’ 이분법적 구분 경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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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호 사회학자.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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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기생충이라는 제목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다. 누가 우리 사회의 기생충인가?
손 중요한 질문이다. 우리는 기생충이 해만 끼치는 징그러운 존재로 보고 없애려 한다. 그런데 너무 깨끗한 환경에서 생활하면 사람의 면역계는 오작동하고, 도리어 자신의 몸을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으로 고통받을 수 있다. 그래서 크론병 환자에게 돼지편충을 먹여 치료하기도 한다. 더럽고 위험한 생각을 떨치려다 결벽증과 강박 장애 같은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필연적으로 섞여서 살아야 하는 사회에서 타인을 기생충으로 바라보기보단 공생하고 상생해야 할 존재로 봐야 한다. 기생충은 타자가 아니라 도리어 우리 안에 타인을 배제하고 자기만 잘 먹고 잘살려는 이기적인 마음과 욕망일 수 있다.
김 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 중 하나가 ‘감염공포’다. 우리는 기생충을 경멸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한다. 타자와 나를 구별 짓는 여러 담론에는 바로 이런 감정이 깃들어 있다. 영화 속에서 연교가 “손은 씻으셨어요?”라고 할 때, (기택이 꾸민) 각혈의 흔적을 봤을 때의 심리다.
손 기택네나 근세네가 박 사장네에 기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사도우미나 도와주는 사람 없이는 집안이 엉망이 되고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박 사장네 집을 생각해보면, 도리어 누가 의존하는 기생충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결국 우리 사회는 누구나 일방적 해를 입히고 당하는 대립관계가 아닌 돌고 도는 원과 같은 관계다.
김 인간은 기본적으로 상호의존적이다. 아무리 부자여도 늙으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모두가 서로 빌붙어 사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기생충이 아니라 흡혈귀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흡혈귀는 정당한 노동 없이 남을 착취해 부당이득을 취하는 사람을 뜻한다.
사회 영화의 결말은 상상을 과감히 끊어내고 현실로 돌아와 끝이 난다. 기택네 가족은 어떻게 될까? 그들의 미래는 무엇을 시사하나?
손 기택네 가족에 대해 많이들 궁금해하는데, 박 사장네 가족은 과연 그 후로 어떻게 됐을까? 다송이는 생일날 무서운 아저씨를 목격해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또 그다음 생일날엔 아빠가 살해당하고 추억이 있는 집을 떠나게 됐다. 다혜와 연교는 또 어떻게 됐을까?
김 박사장 가족에 대한 무관심 속에는 ‘돈이 있으니 어떻게든 살겠지’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하지만 부자들도 얼마든지 고통을 겪는다. 그런 가능성에 눈 감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돈 중심의 사고다.
사회 듣고 보니 일리 있다.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서, 결말이 지나치게 현실적이라 우울하고 씁쓸하다는 평가도 나오는데?
손 기우가 평생 벌어도 결국 그 저택을 살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많이들 부정적 결말로 이야기한다. 그런 사회현실에 충분히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열린 결말을 보고 싶고 ‘기우 무시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기우는 욕망을 상징하는 수석을 받고 민혁 따라쟁이처럼 명문대생인 척하면서 남을 속이고 해치는 허황된 ‘가짜 힘’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결국 헛된 욕망을 내려놓듯 돌을 자연으로 돌려놓는다. 기우가 앞으로 어떤 성취를 해 나갈지 누가 속단할 수 있나? 우리 주변에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열심히 자기 길을 가고 있는 수많은 ‘기우’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았으면 한다.
사회 지나친 낙관론 아닌가?
김 봉 감독은 아주 현실적인 결말을 끌어냈다고 본다. 대다수가 동의하는 결말이리라. 다만, 모든 것이 사회 구조 탓이라고만 하면, 인간은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인가? 과도한 결정론은 피해야 한다. 노력해도 힘든 사회라 해도 그렇기 때문에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회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좀 더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면, 어떤 부분일까?
김 영화에서 추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존엄’이다. 존엄을 빼앗기면 죽는다. 즉, 모멸을 받고 혐오의 대상이 되면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있다. 불쾌함에 대한 역치(자극에 대해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 세기)가 너무 낮으면, 나와 남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면서 모욕하고 배척하기 쉽다. 그걸 경계해야 한다. 사회정책적으로 소셜믹스를 많이 이야기하는데, 계층 분화가 공간 분절로 이어지면서 생겨나는 문제들이 많다. 교회도, 학교도, 집도 계층별로 나뉘고 있다.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많아져야 한다.
손 영화 속의 근세는 지하방을 안락하게 느끼고 박사장을 리스펙트(존경)하며, 동물적 욕구 충족에만 몰입하고, 때로 퇴행하여 젖병을 물며, 결국 분노를 이기지 못해 살인을 저지른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려는 의지나 함께 잘 살려는 생각 없이, 작은 안락함이 자신의 모든 세상인 듯 안주하며 본능에만 충실한 근세 같은 삶이야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또 다른 모습은 아닐까? 체제 순응적인 동물 같은 삶을 사는 이는 타인에 대해서도 무자비하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냄새나고 추레한 아저씨를 만날 때 코를 막고 고개를 돌리기보다 조금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영화의 엔딩 곡처럼) ‘메마르지 않은 촉촉한 마음으로’ 찡그린 얼굴을 펴고 아주 작은 친절을 베풀 수 있다면 좋겠다.
사회·정리/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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