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1.02 08:01
수정 : 2018.01.02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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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을 다룬 영화 <1987>에서 ‘연희’역을 맡은 배우 김태리가 지난해 12월 서울 종로구 팔판동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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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속 대학생 연기한 김태리
“한열이도 이런 친구 있었으면…“
배은심 어머님 말씀 듣고 울컥
버스 위 엔딩 찍으며 ‘전율’
“꼭 종교에 빠지는 순간처럼 느껴져”
‘아가씨’ 꼬리표 떼고 존재감 증명
“배우란 직업 즐기는 법 찾기”가 올해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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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을 다룬 영화 <1987>에서 ‘연희’역을 맡은 배우 김태리가 지난해 12월 서울 종로구 팔판동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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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장에 배은심 어머님이 몇 번 오셨어요. 저한테 ‘우리 한열이도 이런 친구 있었으면 참 좋았겠다’ 하셨어요. 순간 울컥하더라고요. 이 영화는 ‘누군가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미래’를 희생한 젊은이들의 이야기구나….”
말간 얼굴이 붉어지고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는 흐려졌다. 영화 <1987> 개봉 즈음 종로구 팔판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김태리(27)는 그때 생각에 자꾸 가슴이 시리다고 했다.
박종철 고문치사로 시작해 이한열 사망으로 정점을 찍은 ‘6월 항쟁’을 다룬 <1987>에서 그는 유일한 허구 인물인 ‘연희’ 역을 맡았다. 연희는 ‘마이마이’로 유재하 노래 듣는 것을 즐기고, 가슴 설레는 연애를 꿈꾸는 평범한 87학번 여대생이다. 시위하는 선배도, ‘불온한 짓’ 일삼는 교도관 삼촌(유해진)도 잘 이해가 안 됐지만, 뜻하지 않게 6월 항쟁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각성해 나가는 캐릭터다.
김태리는 허구의 캐릭터를 연기하며 느낀 어려움에 관해 묻자 “제 역할이 연기하기가 오히려 쉬웠는지 몰라요. 선배님들은 살아계신 분들을 철저히 고증해야 했지만, 전 그저 시나리오에 나온 힌트를 따라 한 장면, 한 장면씩 공부하면 됐으니까요”라고 했다.
현대사에 약한 요즘 세대인 ‘90년생, 08학번’ 김태리에게 87년이 마치 구전동화 속 옛날이야기로 느껴지진 않았을까? “제가 태어나기도 전이지만 30년 전이 그리 먼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이한열 열사는 사진이 너무 유명해 알고 있었는데, 박종철 열사에 대해선 <1987> 찍으며 배우게 됐죠. 촛불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으니 젊은 친구들도 저처럼 느끼길 바라요.”
김태리는 <1987>을 찍으며 촛불시위 당시의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연희가 버스 위에 올라서는 엔딩 장면에서요. 종교를 믿진 않지만, 비유하자면 꼭 종교에 빠져드는 순간 같달까? 눈 감고 귀 닫았던 세상이 ‘이것 봐. 내 말이 맞잖아’라며 그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어요. 시청 앞 광장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함성이 울려 퍼지면서 천지가 개벽할 수준으로 바뀌고….” 그는 연희가 그때 느꼈을 감정이 “희망”일 거라고 했다. “영화 속 박 처장(김윤식)의 모든 것은 ‘애국’으로 귀결되잖아요? 연희에겐 ‘희망’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전 이 영화가 희망을 말하는 작품이라 생각해요.”
한마디 한마디가 거침이 없고 똑부러진다. 당돌하고 다부진 영화 속 연희와 겹쳐진다. 연희가 그랬듯 김태리도 <1987>로 인해 한 뼘은 더 자란 듯 보였다. <아가씨>로 그 누구보다 화려하게 데뷔해 ‘박찬욱의 뮤즈’, ‘신데렐라’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지만, <1987>에서는 그런 꾸밈말이 필요 없을 정도의 존재감을 보여준 터다.
정작 김태리는 “달라진 게 전혀 없다”고 했다. “<아가씨>를 찍을 땐 그게 세상에서 제일 큰 괴로움이었어요. 근데 <1987> 때 그 생각을 똑같이 했어요. 저 원래 ‘잊어버리기’에 능한데, 영화 시작하고는 잊히지 않는 실수에 이불킥만 늘어가요. ‘난 왜 이렇게 부족할까?’만 생각하게 돼 괴로워요.” 그러면서도 ‘더 자란데다 얼굴도 예뻐졌다’는 덕담에 “화장해서 그래요. 근데, 전 풋풋한 게 더 좋아서 잘 모르겠네요”라고 받아치는 여유까지 부리는 걸 보니, 달라진 게 없다는 대답이 무색하다.
임순례 감독과 함께한 <리틀 포레스트>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지만, 김태리는 다음을 향한 잰걸음을 벌써 내디뎠다. 이번엔 ‘드라마’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이병헌과 호흡을 맞춘다. 어떤 목표를 향해 도전을 감행한 걸까? “잡생각으로 늘어난 괴로움을 타개할 방편? 하하하. 드라마 현장은 너무 바빠서 장난 아니래요. 괴로워할 여유도 없을 것 같아요.”
아직은 연기하는 즐거움에 푹 빠지지 못해 앞으로의 숙제도 “배우라는 직업을 즐기는 법 찾기”란다. 하지만 <아가씨>와 <1987>을 거치며 훌쩍 자란 걸 미처 깨닫지 못한 것처럼, 김태리는 이미 인터뷰를 ‘즐기는’ 자신을 모르는 듯했다. 뭐 어떠랴. 이제 겨우 스물일곱, 채워야 할 필모그래피의 여백이 길고 긴 신인인 것을.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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