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1.27 17:57
수정 : 2017.11.27 21:15
[이기주의 영화의 온도] 트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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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럼보>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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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럼보>는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치던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미국에선 진보적 성향의 인사 상당수가 공산주의자로 몰려 국외로 추방되거나 옥고를 치렀다. 황금기를 구가하던 할리우드 역시 광풍의 영향권에 있었다. 1947년에 발족한 반미활동조사위원회는 영화계 종사자 가운데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겠다며 청문회를 열어 배우와 감독은 물론 시나리오 작가들을 향해 질문을 퍼부었다. “당신은 현재 공산주의자입니까? 혹은 과거에 공산주의자였던 적이 있습니까?”
이때 청문회에 끌려 나온 스타 작가 돌턴 트럼보(브라이언 크랜스턴)는 위원회의 질문이 개인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1조에 위반된다며 구체적인 증언을 거부한다. 묵비권을 행사한 것이다. “공산주의자인지 아닌지 답하시오”라는 질문에 트럼보는 조사관을 빤히 쳐다보며 말한다. “‘네’, ‘아니요’로만 대답하는 사람은 바보 아니면 노예입니다!”
이성이 마비된 시대였기 때문일까. 트럼보는 정치적 소신을 굽히지 않은 대가를 혹독히 치른다. 의회모독죄로 1년간 복역하고, 출소 후에는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 일거리를 얻지 못한다. 호구지책이 막막해진 트럼보는 주로 B급 영화를 만드는 제작자 프랭크 킹(존 굿맨)을 찾아가 시나리오를 헐값에 넘긴다. 이후 11개의 가명을 번갈아 사용하며 글을 써 내려간 그는 동료 작가의 이름을 빌려 발표한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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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럼보>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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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트럼보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각본을 쓴다. 선술집과 욕실 등에서 틈만 나면 애벌레처럼 몸을 웅크린 채 타자기 자판을 사정없이 두드리고 또 두드리면서 활자를 빚어낸다. 타닥타닥~ 경쾌한 타자기 소리가 스크린 밖으로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귀를 쭈뼛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글쓰기의 본질에 대해 고민했다. 트럼보라는 작가의 삶을 떠받친 두 개의 기둥은 ‘습관’과 ‘신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글쓰기는 분명 습관의 문제다.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일은 문장을 고치는 행위의 연속이다. 기자와 작가처럼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면 종종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 “비법은 없어요. 글은 엉덩이 힘으로 쓰는 거죠!” 천품으로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더러 있지만, 대개는 시간과 드잡이를 해가며 머릿속으로 쓰고 지우기를 되풀이한다. 어쩌면 작가는 일상에서 글쓰기 습관을 실천하면서 삶의 절벽까지 자신을 밀어붙이는 사람이거나, 절벽 근처에서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어 돌아오는 사람인지 모른다. 트럼보가 끊임없이 자판을 두드려가며 흰 종이를 까맣게 물들이는 일을 멈추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머리와 마음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문장으로 표현하기 위해 낱말을 매만지고, 그걸 한데 모으거나 버리면서 적확한 문장을 만들고, 다시 문장을 쌓아서 튼튼한 문단을 축조하는 과정이야말로 글쓰기의 근간이다. 그러므로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선 ‘남’을 헤아리는 일 못지않게 ‘나’를 헤아리는 게 중요하다. 남이 아닌 나를 이해하는 건 가치 있는 일이다.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 세상을 균형 잡힌 눈으로 볼 수 있고 자신의 상처를 알아야 타인의 상처도 보듬을 수 있으니 말이다.
사람 마음엔 각자의 신념을 닮은 나무가 한 그루씩 자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꽃과 이파리가 돋아나거나 묵은 것이 떨어지기도 하고, 뾰족한 못이 박히거나 빠지기도 하는 나무가…. 트럼보는 시대의 광풍에 휘청일지언정 마음속 나무를 가꾸는 일을 포기하지 않은 인물이다. 부당한 권력에 맞서 개인의 소신을 지켜냈고 타자기를 끌어안고 살아가며 삶의 희망을 키워냈다. 어쩌면 트럼보는 우리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살아간다는 건 마음의 나무를 보듬고 그것이 잘려나가지 않도록 지키는 일입니다. 그 나무를 아름답게 가꾸며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어느 봄날, 아름다운 새 한 마리 날아들 테죠.”
이기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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