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7.10.30 18:49 수정 : 2017.10.30 21:09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이기주 칼럼 영화의 온도]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가을의 소리와 빛깔이 귀와 눈으로 밀려 들어오는 요즘이다. 초저녁에 가로수 밑을 지나면 바람에 흔들린 나뭇잎들이 이리저리 비벼지는 소리가 서걱서걱 들려온다. 누군가 이파리 안에 숨겨놓았던 바람을 한꺼번에 풀어놓은 것만 같다. 그뿐이랴. 서정주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가로수는 붉게 물들어가고 철 이른 낙엽이 하나둘 발등에 떨어진다. 무심한 가을바람이 뺨을 스칠 때마다 곁을 지나간 사람과 사랑이 기억 저편에서 가물거린다. 가을이 짙어질수록 마음 한편이 허물어진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로맨스 코미디 장르를 좋아하는 관객들 사이에선 세월이 흐를수록 두고두고 회자하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라는 영화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시카고에서 대학을 졸업한 해리(빌리 크리스털)는 여자친구의 소개로 샐리(맥 라이언)의 차를 얻어 타고 뉴욕으로 향한다. 둘은 만나자마자 남녀 사이에도 우정이 가능한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인다. 시쳇말로 ‘썸’을 타기는커녕 성격과 취향이 다르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쿨하게 돌아선다.

세월이 흐른 뒤 공항과 서점에서 우연히 재회한 해리와 샐리는 잠버릇과 즐겨 보는 영화 따위를 묻고 답하는 사이 묘한 동질감과 친밀감을 느낀다. 서로를 향한 삐딱한 시선을 거두고 차츰 가까워진 두 사람은 다양한 각도에서 상대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사랑과 이별에 대한 고민까지 털어놓으면서 마음의 문을 열고, 일상에 지칠 때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삶의 비애와 허무를 쓰다듬어주는 관계로 거듭난 해리와 샐리는 10여년 만에 친구가 된다.

여타 로맨스 영화가 그렇듯, 친구로 지내는 두 사람 사이에 예상치 못한 달콤한 기류가 형성되면서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틈틈이 센트럴파크 산책로에 나뒹구는 낙엽을 함께 밟아가며 아슬아슬한 밀고 당기기를 이어가던 어느 날, 샐리를 향한 마음을 깨달은 해리는 엉뚱하면서도 섬세한 고백을 토해낸다. “많이 생각해 봤는데 널 사랑해. 여름에도 춥다는 너를 사랑해. 샌드위치 주문에도 한 시간 넘게 걸리는 너를 사랑해!”

혹자는 명절 때마다 방송사 편성표를 차지하는 이 영화를 그저 그런 코미디물로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겐 영화의 메시지가 그리 간단치 않아 보였다. 샐리와 해리가 사소한 의견 차이로 옥신각신하며 다투는 모습, 그러니까 관객에게 아기자기한 웃음을 선사하는 장면에서 나는 사랑과 취향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몇 해 전 대학 선배의 부친상 소식을 듣고 상갓집을 찾았다. 선배는 가슴팍을 때리며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사연이 있어 보였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선배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음식을 영정사진 앞에 올려놓고 싶은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선배는 사춘기 때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진 뒤부터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다고 했다. 식사 자리에선 말을 섞는 게 어색해서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고, 그러다 보니 아버지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관심을 두지 못했다는 것. 선배의 얘기를 듣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선배의 울음과 빗소리가 밤새 뒤섞였다.

취향은 저마다 다르다. 더욱이 그것은 단기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녹아서 사람의 마음과 몸에 스미는 것이다. 몇몇 작가의 말마따나, 취향은 인간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타인의 취향을 알아가는 것은, 그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대의 취향을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존중하는 자세야말로 사랑을 표현하는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는 광고 문구에 불과하다. 사랑한다면 묻고 답해가면서 서로의 취향과 기호를 헤아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랑한다면….

이기주 작가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