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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0.09 12:02 수정 : 2017.10.09 20:44

영화 ‘계춘할망’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이기주의 영화의 온도] ‘계춘할망’

영화 ‘계춘할망’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세상살이가 힘들어도 온전한 내 편 하나만 있으면 살아지는 게 인생이야”라고 손녀에게 삶의 지혜를 들려주는 할머니가 있다. 제주도 푸른 바다에서 물질하며 살아가는 그녀의 이름은 홍계춘(윤여정). 계춘은 손녀 혜지(김고은)를 금지옥엽으로 키운다. 혜지가 유일한 혈육인 데다 12년 전에 시장통에서 잃어버렸다가 기적적으로 재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춘기 소녀 혜지는 할머니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하며 도무지 마음을 열지 않는다. 집에선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할머니를 대하고, 학교에선 거친 말과 삐딱한 눈빛을 쏟아내며 외로움을 자초한다.

혜지의 내면에 일렁이는 파도를 다독이는 건 바다처럼 깊고 너른 할머니의 사랑이다. 계춘은 밤늦게 귀가한 혜지를 위해 정성이 깃든 저녁상을 준비하고 생선을 일일이 손으로 발라주며 밥을 떠먹인다. 허기진 혜지의 몸과 마음을 따듯하게 채워준다. 따스한 밥알이, 아니 할머니의 사랑이 입안으로 밀려 들어오자 혜지의 입가에 어색하지만 엷은 미소가 번진다. 과연 ‘손녀 바보’ 계춘의 지극정성이 혜지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힐 수 있을까? 12년의 공백을 뛰어넘어 두 사람은 거리를 좁힐 수 있을 것인가?

계춘이 혜지에게 반찬을 건네는 장면과 포개지는 기억이 있다. 얼마 전 상암동에서 일을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40대 후반쯤 돼 보이는 사내가 옆자리에 앉자마자 점퍼에서 빵을 꺼내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입속으로 빵을 털어 넣다시피 했다. 별안간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남자의 휴대전화 너머에서 “저녁은 먹고 다니는 거냐?”라고 묻는 노모(老母)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남자는 힘겹게 답했다. “엄마야? 잘 먹고 다니지. 요즘 집에 못 가서 미안해요. 내가 가고 싶은데, 자주 가고는 싶은데….” 남자는 말을 흐리며 전화를 끊은 뒤 머리를 감싸고 소리 없이 흐느꼈다. 그는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목구멍 속으로 구겨 넣기 위해 애쓰는 듯했다.

영화 ‘계춘할망’ 포스터. 한겨레 자료사진
자식이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 염려하는 부모의 마음은 한결같다. 자식이 장성해도 걱정의 빈도와 농도에는 변함이 없다. 부모가 혀와 목구멍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건져 올린 “얘야, 밥은 먹었느냐?” 하는 질문 앞에서 자식은 감히 버텨낼 수 없다. 그런 문장을 듣자마자 우린 어린 시절 어머니가 챙겨주던 따스한 집밥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면 어딘가 잠복해 있던 부모를 향한 애틋함과 그리움이 가슴 속에서 북소리처럼 둥둥 퍼져 나간다. 어떤 이들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입을 벌려 엄마의 “엄…” 하는 첫 음절을 발음하다가 왈칵 눈물을 쏟아내고 만다. 세상살이가 힘겨울수록 울음은 빠르게 터져 나온다.

이날 버스에서 내리면서 나는 동사 ‘먹다’와 가장 가까운 낱말이 ‘살다’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린 참 많은 것을 배 속으로 욱여넣거나 입으로 베어 먹으면서 살아간다. 매일 밥을 먹고 커피와 물을 마시고 저녁엔 괴로운 마음에 술을 삼켜 몸을 채운다. 그뿐이랴. 때론 별다른 이유 없이 회사에서 욕을 먹기도 하고, 굳이 먹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도 매년 나이를 먹게 된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여정에서 ‘살다’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동사는 분명 ‘먹다’일 것이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영화 <계춘할망>은 줄거리만 놓고 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영화 같기도 하다. 그리 새롭지 않은 이야기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던 순간 극장 안은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했다. 나도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부모가 자식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밥은 먹었냐?” 하고 물어보는 건 자식이 잘 살아가고 있는지 걱정돼 던지는 질문이라는 것.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부모’라는 단어의 유의어는 결국 ‘눈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기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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