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원작과 비교해보니】
‘치매 걸린 연쇄살인범’ 설정 그대로 차용
살인의 이유·딸 지키는 까닭은 원작과 달라
원작의 작은 캐릭터에 살 붙여 입체감 부각
‘10㎏ 감량’ 노인 역 도전 설경구 연기 빛나
원작은 심리스릴러 영화는 ‘액션 스릴러’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쇼박스 제공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김영하의 베스트셀러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은 ‘연쇄살인범이 치매에 걸렸다’는 참신한 설정,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한 ‘살인범의 일기’를 뼈대로 하는 색다른 구성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현실과 망상을 오가는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을 무기로 독자를 혼란으로 몰아넣으며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는다. 특히 마지막 ‘반전’은 시속 100㎞로 질주하던 차가 일순간 급정거를 하는 듯한 충격을 안기며 ‘심리 스릴러’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자랑한다.
원신연 감독은 “소설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영화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감독의 이런 포부는 관객에게 합격점을 받을 만큼 실현됐을까? 원작 소설과 영화를 비교해본다.
■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건네는 짓궂은 농담, 치매” 원작과 영화는 가장 핵심적인 ‘설정’을 공유한다. “17년(소설에선 25년) 전까지 연쇄살인범이었지만, 지금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병수(설경구)”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병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낯선 남자 태주(김남길)의 차를 들이받는 사고를 낸다. 그는 태주의 눈빛을 보고 자신과 같은 살인자임을 직감한다. 마침 병수네 동네에서 20대 여성 살인사건이 잇달아 발생한다. 외동딸 은희(설현)와 태주가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병수는 그의 접근이 의도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태주로부터 은희를 지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다.
영화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병수의 일기와 녹음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순간순간 기억이 사라지거나 과거와 현재가 뒤죽박죽돼 괴로워하는 병수의 심리적 갈등에 집중한다. 독자들이 그랬듯 관객 역시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이 병수의 망상인지 아니면 진짜 현실인지 끊임없는 물음표를 던지며 의심하게 된다. 피와 살이 튀는 잔인한 장면 하나 없이도 스릴러 영화로서의 매력이 한껏 발휘되는 지점이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쇼박스 제공
■ “살인을 추동한 힘은 아쉬움이었다” 원작은 병수의 살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원작 속 살인의 이유는 충동도, 변태성욕도 아닌 ‘아쉬움’이다. 하지만 영화는 병수의 살인에 ‘합당한 동기’를 부여한다. “죽어 마땅한 세상의 쓰레기를 청소한다”는 명분이다. 살인의 이유를 그럴듯하게 포장했기에 은희를 지켜야 할 이유에도 정당성을 부여한다. 소설에서는 병수가 “빈말을 일삼는 놈들을 싫어하기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은희를 끝까지 보호한다. “은희가 살해당한다면 그것은 수치”라고 병수는 생각한다. 반면, 영화에서는 이 모든 것이 딸을 지키기 위한 애끓는 부성애로 포장된다.
살인하는 이유, 딸을 지키는 이유가 너무 상투적이며 구태의연하다. 이런 클리셰 탓에 원작에서 극대화됐던 사이코패스 병수의 ‘특수한 이질감’, 그로 인해 순간순간 만들어지는 ‘시니컬한 유머’가 영화에서는 그다지 도드라지지 않는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쇼박스 제공
■ “혼돈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소설에서 병수를 제외한 다른 캐릭터는 ‘입체감’이 없다. 병수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태주(소설 속 박주태)는 감독이 병수 못지않게 공을 들인 캐릭터로 재탄생했다. 은희의 연인이자,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이며, 마지막까지 병수와 대결을 펼치는 ‘미스터리한 인물’로 관객을 혼돈으로 몰아넣는다. 소설과 달리 영화의 ‘반전’이 홑겹이 아닌 여러 겹인 것도 태주 때문이다. 병수의 오랜 친구이자 파출소장인 병만(오달수, 안 형사) 역시 상당한 비중을 가진다. 다만, 코믹 요소를 위해 병만 캐릭터가 부자연스럽게 소모되는 점은 아쉽다.
원작만큼 영화에서도 병수는 펄떡이며 살아 숨쉬는 캐릭터다. 설경구의 연기력 덕분이다. 매일 줄넘기 1만개씩을 하며 10㎏ 넘게 감량했다는 설경구는 특별한 분장 없이도 버석버석하고 마른 느낌의 노인으로 변신했다. 특히 기억이 사라지기 전 나타나는 얼굴 경련은 ‘디테일 연기’가 무엇인지 완벽하게 증명한다.
‘심리 스릴러’인 소설과 달리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액션 스릴러’로 변한다. 감독이 ‘힘’을 준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너무 과하고 늘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깔끔하고 임팩트 있는 마무리가 아쉽다. 9월7일 개봉.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관련 영상] <한겨레TV> | 잉여싸롱2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