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8.23 15:47
수정 : 2017.08.24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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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훈 애니메이션 감독이 17일 오후 서울 중구 작업실 자신의 작품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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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소설을 애니로 만드는 안재훈 감독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이어 두번째
황순원 작가 유족 1년 넘게 설득 끝 허락 얻어
상상력 더했지만 원작의 말모양과 대사는 오롯이
1년반 공들여 3만장 원화 손으로 직접 그려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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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훈 애니메이션 감독이 17일 오후 서울 중구 작업실 자신의 작품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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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 이번 계집앤 어린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황순원 작가의 단편 <소나기>의 이 서정적이면서도 옹골찬 문장이 애니메이션으로 부활한다. 오는 31일 개봉하는 안재훈(48) 감독의 애니메이션 <소나기>를 통해서다.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2014)에 이은 안 감독의 두 번째 ‘한국 단편문학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다. 그를 지난 17일 ‘연필로 명상하기’ 작업실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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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소나기> 중 한 장면. 연필로 명상하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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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소설, 특히 한국 단편문학을 굉장히 좋아해요. 그런데 아무도 이걸 애니로 만들어주질 않아서 직접 나선 거예요.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은 저 자신을 위해서예요. 물론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거라고 생각하는 어르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죠. 손자·손녀, 할아버지·할머니, 아버지·어머니까지 3대가 함께 보면 얼마나 좋을까요?” 학창시절 ‘문학청년’이었다는 안 감독은 한국 단편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기는 작업을 계속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의 심지는 굳건했지만, 유족을 설득하는 것은 꽤 힘든 과정이었다. 황 작가의 아들인 황동규 시인에게 1년 넘게 편지를 보내고 양해를 구한 끝에 허락을 얻어낼 수 있었다. “전작인 <소중한 날의 꿈>과 <메밀꽃…>을 통해 작품을 대하는 태도를 살펴보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소나기>의 스케치를 보시더니 ‘자네들이라면 해낼 수 있겠네’라며 승낙하시더라고요.” 당시에는 애가 탔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과정이 스스로를 다지는 계기가 된 것 같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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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소나기> 한 장면. 연필로 명상하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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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이 있는 작품을 각색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기승전결이 분명치 않은 <소나기> 같은 작품은 더더욱 어렵다. “무엇보다 주인공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어요. 소녀는 분홍 스웨터, 남색 치마, 단발머리 정도고, 소년에 대한 건 아예 없죠. 황순원 선생의 작품에 군더더기가 전혀 없잖아요. 어렵지만 한편으로는 상상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어 즐겁고 행복하기도 했네요.” 다만 소설 속 ‘빛나는 대사’는 단 한 줄의 생략 없이 오롯이 살아 펄떡인다. “<소나기>가 <소나기>인 이유는 ‘말 모양’ 때문이기도 해요. 서울에서 온 소녀와 시골 사는 소년이 대화하는데 사투리가 없어요. 말투도 독특하게 오묘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다’로 끝나요. 성우들이 더빙하는 데 어색하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맛이 잘 살더라고요.”
최근에는 애니메이션과 웹툰 작업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지만, 안 감독은 모든 작품을 연필로 한 장 한 장 그린다. ‘연필로 명상하기’라는 스튜디오 이름이 보여주듯이. “공장 김치와 달리 어머니 김치에선 ‘손맛’을 느낄 수 있듯 그림도 마찬가지예요. 손맛은 관객이 먼저 알아봐줄 거라 믿어요. 요즘같이 기계가 발달한 시대에 손으로만 그린 그림을 보는 아날로그적인 경험은 그 자체로 소중하지 않나요?” 1년 반 동안 안 감독과 스튜디오 애니메이터들이 그려낸 3만장이 넘는 원화는 그런 ‘옹고집’의 산물이다. 한 폭의 수채화와도 같은 그림이 원작 소설의 아련한 감성을 배가시킨다. “<소나기>는 상영시간이 50분 남짓밖에 안 돼요. 부담 없죠. 첫사랑의 기억, 냇가에서 물장난 치던 추억을 떠올리며 어린 시절과 만나는 경험을 하셨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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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소나기>의 한 장면. 연필로 명상하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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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디즈니, 일본 지브리 애니에 익숙한 우리에게 한국만의 애니 문화가 생겨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안 감독. 기획부터 완성까지 11년이 걸린 <소중한 날의 꿈>(2011)이 <트랜스포머3>에 밀려 일주일 만에 스크린에서 내려왔을 때도 희망을 놓지 않은 이유다.
노력은 계속된다. <소나기>에 이어 11월엔 김동리의 <무녀도>를 개봉한다. 이상의 <날개>,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 등도 계획 중 하나다. 내년 연말 개봉을 목표로 창작 애니메이션 <살아오름: 천년의 동행> 작업도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중국 창춘에도 6명의 직원을 둔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이렇게 많은 일을 벌여놓은 안 감독의 목표는 역설적이게도 ‘은퇴’다. “제 낙관에 ‘흙 묻은 손’이라고 쓰여 있죠? 얼른 연필을 놓고 흙을 만지고 싶다는 뜻이에요. 그래야 우리 스튜디오 후배들 작품도 빨리 만나볼 수 있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연신 다음 작품 설명에 흥을 내는 그는 천생 “그림으로 연기를 하는” 애니메이터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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