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8.14 15:16
수정 : 2017.08.14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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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굿 윌 헌팅>.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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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주의 영화의 온도] 굿 윌 헌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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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굿 윌 헌팅>.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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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 알다(知)가 명사 알(卵)에서 파생했다는 설이 있다. ‘아는 행위’는 사물과 현상의 외피뿐만 아니라 내부까지 진득하게 헤아리는 걸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린 늘 “누군가를 잘 안다“고 떠벌리기 좋아한다. 우연히 겸상하거나 한두 번 대화를 주고받은 뒤 확신에 찬 어조로 ”내가 그 사람을 좀 알지!“라고 쉽게 내뱉곤 한다. 하지만 ”이미 다 안다“고 이야기하는 순간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충분히 알고 있다는 지나친 확신이, 때론 상대를 알아가려는 노력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굿 윌 헌팅>의 주인공 윌(맷 데이먼)은 매사추세츠공대에서 청소 일을 하는 청년이다. 비상한 두뇌를 지녔지만, 어린 시절에 받은 학대로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지 오래다. 타인과의 소통은 물론 자신을 헤아리는 일에도 익숙하지 않은 윌의 내면은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하다. 밤마다 술집에서 대학생들과 싸움을 벌이기 일쑤다. 폭력 전과가 수두룩한 데다 문제아란 낙인이 찍힌 그에게 먼저 다가와 따듯한 손길을 건네는 사람도 없다. 편견의 벽에 갇힌 윌은 자꾸만 일탈의 길로 빠져든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대학 수학과 램보 교수가 칠판에 적어놓은 난해한 수열 문제를 윌이 단숨에 풀어낸다. 윌의 천재성을 알아본 램보 교수는 그를 밝은 길로 이끌려고 노력한다. 램보 교수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심리학과 교수인 숀(로빈 윌리엄스)에게 윌의 심리 치료를 부탁한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떨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숀 교수는 윌의 가슴에 꼭꼭 숨어 있는 내밀한 상처와 마음에 몰아치는 비바람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살다 보면 대충 보아서는 알 수 없는 대상이 참으로 많다. 특히 사람이 그렇다. 숀은 윌의 성격과 사람됨을 함부로 분석하거나 단정짓지 않는다. 섣부른 판단을 유보한 채 편견 없이 윌을 대한다. 숀은 자책과 분노로 똘똘 뭉친 윌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읊조린다.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 이 짧은 문장은 윌의 귓속으로 스며들어 마음에 가닿는다. 이는 숀이 윌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유일한 문장인 동시에, 윌이 누군가에게 듣고 싶어 한 유일한 문장이었다. 윌은 숀의 품에 안겨 펑펑 눈물을 쏟아낸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두운 터널 속에서 희미한 빛을 발견하고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빛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빛만 응시해선 안 되는 것 같다. 광명을 손에 움켜쥐려면 암흑을 응시하고 그것을 손끝으로 매만져가면서 걸음을 옮겨야 한다. 밝은 것을 찾아내려면 어두운 것을 직시해야 한다. 어둠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우린 빛을 향해 다가설 수 있다.
그렇다면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 나는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 물음을 감당할 수가 없다. 다만 조심스레 의견을 말할 수는 있다. 어둠과 밤을 버텨내려면 무엇보다 자신을 믿고 용서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삶의 여정에서 자신을 향한 불신은 희망과 용기 따위를 삼켜버린다. 반면 자신에 대한 믿음은 종종 허공으로도 길을 내곤 한다.
난 가끔 삶이 버겁거나 내가 느끼는 죄책감이 비겁함으로 둔갑하려는 순간마다, 숀 교수가 윌에게 들려준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문장을 입을 벌려 또박또박 발음한다. 그러면서 하릴없이 되뇐다. 남을 헤아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나를 헤아리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지 모른다고. 살면서 내가 진정으로 용서해야 하는 대상은 남이 아니라 나인지 모른다고….
이기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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