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7.03 15:21
수정 : 2017.07.03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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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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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주의 영화의 온도] <태풍이 지나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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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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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작업실에서 원고를 쓰다가 도무지 글이 써지지 않아서 노트북을 내려놓고 밖을 나섰다. 여름 바람의 흥얼거림을 듣고 하얗게 부서지는 7월의 햇살을 온몸에 바르다 보면 참신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었다. 현관을 나서면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 생애를 다 겪은 것 같은 메마른 얼굴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삶은 그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우린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종종 좌절하고, 꿈꾸는 대로 흐르지 않는 인생이란 강물에 눈물을 떨어트린다. “모두 내 탓이야”라며 자신을 책망하거나 심지어 미워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죄책감과 죄악감의 찌꺼기가 가슴을 파고드는 날이면, 삶에 대한 희망을 버린 채 절망이라는 녀석과 함께 어두운 골방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든다.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에 등장하는 철부지 아빠 료타는 마음에서 삶에 대한 의욕을 밀쳐내고 근근이 살아가는 인물이다. 십수년 전 소설을 출간해 문학상을 받은 경력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영광일 뿐. 지금은 흥신소에서 일하며 펜 대신 사진기를 손에 쥔 채 타인의 사생활을 캔다. 늘 돈이 궁한 료타는 걸핏하면 어머니와 누나에게 손을 벌린다. 이혼한 전부인에겐 자녀 양육비를 제때 주지 못해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는다. 어쩌다 수입이 생기면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를 듣고 침을 흘리는 것처럼 부리나케 경륜장으로 걸음을 옮겨 보지만, 그곳에서 그는 트랙을 내달리는 자전거보다 더 빠르게 돈을 탕진한다.
료타가 소설가로서의 꿈을 아예 접은 건 아니다. 만화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해달라는 출판사의 제안을, “소설을 준비하고 있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틈틈이 주변 인물의 대화를 메모하고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이야깃거리를 수집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입버릇처럼 말한다. “난 대기만성형이야!” 료타의 어머니 요시코도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 그녀는 이웃을 만날 때마다 “소설 쓰는 아들입니다”라고 료타를 소개한다. 료타는 겸연쩍어하면서도 미소를 감추지 않는다. 마음속 깊은 곳엔 여전히 소설가라는 꿈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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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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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몰아닥친 어느 날, 료타 가족은 요시코의 아파트에 모여 의도치 않게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는 초등학생 아들 싱고가 료타를 바라보며 묻는다. “아빠는 뭐가 되고 싶었어? 되고 싶은 사람이 됐어?” 료타는 잠시 뜸을 들인 뒤 가까스로 입을 연다. “아빠는 아직 되지 못했어. 하지만 되고 못 되고는 문제가 아니란다.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거지.”
돌이켜보면 한때 나도 어깨를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가슴 밑바닥에 숨겨놓은 설움을 부여잡고 꾸역꾸역 걸어가야 하는 삶의 여정이 힘겨웠다. 한걸음 한걸음 발을 내디딜 때마다 몸속에 쟁여져 있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수렁에서 날 건져 올린 건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눈물은 내 방황을 멈추게 했다. 어머니는 영화 속 료타의 어머니 요시코처럼 철석같이 자식을 믿어주었다. “기주야, 난 널 믿는다. 그러니 너도 널 믿었으면 좋겠다. 널 미워하지 말고 스스로 용서하면서 살아가렴.”
어느 영화 대사처럼,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어도 온전한 내 편 하나 있으면 살아지는 게 인생인지 모른다. 몸이 지치고 마음이 뭉개질수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볼 필요가 있다. 왈칵 솟아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나를 둘러싼 사람과 관계를 되짚어봄 직하다. “세상 모두가 널 손가락질해도 내가 네 편 해줄 테니 너는 네 원대로 살아라” 읊조리며 마음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린 꽤 짙고 어두운 슬픔도 견딜 수 있다. 온전한 내 편이 하나만 있다면….
이기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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