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6.12 18:37
수정 : 2017.06.1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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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이란> 포스터.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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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주 칼럼 영화의 온도】 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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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이란> 포스터.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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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담배에 절어 있을 법한 한 건달의 어깻죽지가 격하게 흔들린다. 건달의 눈물이 부둣가를 적신다. 온몸으로 오열하며 새벽 바다를 처절한 울음소리로 채우는 남자의 이름은 강재(최민식). 그의 손에는 죽은 아내의 편지가 들려 있다. 그런데 그는 아내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파이란>의 강재는 깡패라고 하기엔 주먹이 너무 약하고 마음은 더 약하다. 비슷한 시기에 어둠의 세계로 뛰어든 동기 건달은 조직의 우두머리가 됐지만, 강재는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새까만 후배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다. 물론 강재도 인생의 목표는 있다. 인간은 가슴속에 낙원을 품은 채 살아가기 마련이다. 우린 그걸 꿈이라고 부른다. 강재는 번듯한 배 한 척 마련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루하고 무의미한 현실을 견뎌낸다.
하류 건달의 뒷골목 표류기 같은 영화의 물길은, 난초처럼 청초한 파이란(장백지)의 등장과 함께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중국에서 온 파이란은 한국에 체류하며 돈을 벌기 위해 강재와 위장결혼한다. 삼류 건달이 측은지심이나 휴머니즘에 근거해 그녀의 서류상 남편이 되어줄 리 만무하다. 강재는 뒷돈을 챙긴다. 그런데도 골방에서 겨울을 나며 허드렛일에 파묻힌 파이란은 강재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그리움을 쏟아낸다. 강재를 향해 투명한 연정을 품는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을 누일 곳이 필요하지 않은가. 몸이 아닌 마음을 누일 곳이. 낯선 땅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간 파이란도 어쩌면 그러했으리라.
영화의 후반부는 관객의 눈가를 촉촉이 적신다. 파이란의 사망 소식을 접한 강재는 기차에 올라 그녀가 서툰 글씨로 꾹꾹 눌러쓴 편지를 읽어 내려간다. “처음 바다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도 만났습니다. 강재씨, 당신 덕분에 여기서 일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기 사람들은 모두 친절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가장 친절합니다. 당신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당신을 만나면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강재씨, 당신을 사랑해도 되나요?”
파이란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강재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파이란이 자기를 연모했음을 뒤늦게 알게 된 강재는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감정의 스위치를 켠다. 강재는 파이란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서럽게 흐느낀다.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눈물을 도로 집어넣으려 애쓰지만 소용없다. 강재는 파이란의 편지를 가슴에 품은 채 깊고 긴 울음을 토해낸다.
오래전 어느 날 <파이란>을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나는 그리움의 본질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움은 손이 닿지 않는 것이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메울 수 없는 허공의 풍경이다. 그리움의 대상은 꽃을 닮았다. 마음으로 품었으나 두 팔로는 품지 못한 꽃, 결코 만져지지 않는 꽃이다. 누구든 그런 꽃 한 송이쯤 마음에 심어 놓았을 것이다. 봄이 솟아나고 여름이 밀려와 무수히 많은 꽃이 화단에 만발해도, 아끼는 꽃잎 하나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땅으로 떨어져 바스러지면, 그 덧없음과 그리움을 도무지 달랠 길이 없다. 그리움을 품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마음에서 그리움을 단번에 밀쳐낼 수 있는 감정도 없다.
다만 어떤 그리움은 삶의 은밀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 시인 이해리는 “철새는 그리움의 힘으로 날아간다”고 했다. 사람도 매한가지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우린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매일 그리워하면서 ‘그리움의 힘’으로 인생의 바다를 건너가는지도 모른다. 강재가 고향을 떠올리며 삶을 살아낸 것처럼, 파이란이 강재를 마음에 품은 채 현실을 버틴 것처럼 말이다. 작가
이번 주부터 에세이 <언어의 온도>를 낸 이기주 작가가 영화와 ‘삶의 온도’를 주제로 한 글을 3주에 한 번씩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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