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뜨는 독립영화 감독 셋
‘108 : 48’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상영된 한국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의 편수다.(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5~6월 통계 미집계) 상업영화의 절반 가까운 숫자의 독립영화가 개봉한 셈이니 양적으로 독립영화는 상업영화 못지않은 규모 있는 시장을 형성한 듯 보인다. 하지만 같은 기간 한국영화 흥행 1~20위 가운데 독립영화는 단 한 편뿐이다. 독립영화 시장은 ‘공급’에 견줘 ‘수요’가 매우 적은 불균형 상태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여기 참신함과 발랄함, 놀라운 상상력을 무기로 관객 공략에 나선 신인 독립영화 감독들이 있다. 이제 첫 장편 데뷔 영화를 들고 관객과 만나는 이들은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은 물론 입소문을 타고 개봉 전부터 관객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1인 제작사, 창작집단, 배우들과 공동투자 등 제작방식 역시 상업영화와는 달리 다양하고 실험적이다. 2017년 상반기, 빛나는 신예 감독 3명을 통해 한국 독립영화의 미래를 가늠해본다.
■ 영화마다 같은 얼굴 ‘고봉수 사단’…‘델타 보이즈’ 고봉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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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타보이즈의 고봉수 감독이 8일 오후 서울 마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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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혼자 시나리오·촬영·편집까지 1인3역, 총 제작비 250만원, 촬영기간 9일.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대상을 거머쥐며 파란을 일으킨 영화 <델타 보이즈>(상영 중) 이야기다. 뭔가 현실적이지 않은 듯 느껴지는 첫 장편영화 제작기만큼, 8일 <한겨레>에서 만난 고봉수(41) 감독은 범상치 않았다.
“서울서 부산 가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케이티엑스, 자동차, 자전거…. 우린 돈이 없어 걸어서 부산까지 간 거예요. 뭐 어때요? 부산만 가면 되죠. 하하하.”
네 남자의 ‘4중창 대회 참가 연습기’를 담은 영화 <델타 보이즈>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리멸렬하고 답답한데, 배꼽이 빠질 듯 웃기다. 연습하자고 모였지만 사장님과 아내의 잔소리, 생활고 등에 치인 4명의 삶은 구차하기만 하다. 다투고 화해하느라 연습은 뒷전. 대회에 참가할 수 있을지 막막하고, 끝내는 이들이 정말 노래를 하고 싶은 건지조차 알 수 없다. ‘무식하게 용감하고 대책 없이 당당한’ 모습이 왠지 감독의 태도와 묘하게 닮았다.
“맞아요. 이 영화는 제 판타지예요. 남들에게 좀 민폐를 끼치더라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얘기요. 꿈이 안 이뤄지면 좀 어때요? 꿈이 있다는 게 중요하고, 그로 인해 신나고 재밌으면 그만이죠.” 웃음기가 가시고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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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타 보이즈>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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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감독은 서울 수도공고를 졸업했다. 영업직, 세탁소, 공사현장 등을 전전하며 일했지만, 삶은 무료했다. 27살 때 ‘내가 뭘 좋아하지?’라고 자신에게 던진 물음에 돌아온 대답이 ‘영화’였다. 그 길로 80만원짜리 3개월 단기 속성 아카데미에 등록해 기본적인 촬영·편집 기술을 배웠다. 삼촌을 주인공으로 한 <개구녘>이라는 단편영화를 시작으로 닥치는 대로 영화를 찍었다. “일주일에 한 편씩 공장에서 물건 찍듯 습작 영화를 찍었어요. 그렇게 10여년 동안 찍은 영화가 한 200여편 돼요.”
<델타 보이즈>는 시나리오 30%에 배우들 애드리브 70%가 만나 완성된 영화다. 배우들이 가진 만큼 돈을 내 투자도 했다. 말 그대로 감독과 배우의 ‘완벽한 합’으로 만들어낸 영화다. “하도 먹는 장면이 많아 ‘먹방영화’라는 애칭도 있는데, 사실 촬영하다 돈도 없고 배가 자주 고프니 촬영과 식사를 한꺼번에 해결하느라…. 삼겹살 굽는 장면 찍고, 카메라 내려놓은 뒤 미친 듯 먹고. 하하하. 우리는 식구니까요.”
생사고락을 함께한 배우들은 이제 ‘고봉수 사단’이 됐다. 고 감독의 두 번째 영화이자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대명컬처웨이브상 수상작인 <튼튼이의 모험>과 현재 촬영 중인 <프리티 해리>에서도 이들은 다 같이 출연하고 또 투자도 했다. 어떻게 모든 영화를 같은 배우랑 찍냐고 물었더니 단순명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주성치 영화엔 항상 오맹달이 나오잖아요.”
성격이 급해 영화 한 편 찍고 나면 제작비가 모이기도 전에 다시 카메라 들고 나선다는 고봉수 감독. “재밌고 신나는 영화가 아니면 찍지 않겠다”는 그에게 독립영화계는 ‘험지’가 아닌 ‘모험의 땅’이다.
■ 외로운 공포 맞서는 ‘1인 제작사’…‘꿈의 제인’ 조현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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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제인> 조현훈 감독이 8일 오전 서울 마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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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여를 공들여 시나리오를 썼다. 하지만 너무나 독특한 소재와 구성 탓에 제작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감독 혼자 ‘1인 제작사’를 차렸다. 촬영과 편집에 다시 2년, 그렇게 4년여 만에 <꿈의 제인>은 관객과 만났다.
“시나리오를 고쳐 쓰며 꼭 영화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한 번도 포기를 생각한 적이 없죠. 독립영화계에서 그나마 전 운이 좋은 편이기도 했고요.”
8일 <한겨레>에서 만난 조현훈(31) 감독은 여러 번 ‘운이 좋았다’고 했다.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며 첫 시나리오가 영진위 창작지원금을 받은 것도, 우연히 배우 구교환(제인)을 만난 것도, 구교환을 통해 이민지(소현)를 만난 것도, 모두 행운이라고 했다.
<꿈의 제인>은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어 가출팸을 전전하는 외로운 소녀 소현과 그런 소현에게 꿈결처럼 다가와 손을 내민 트랜스젠더 디바 제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이 영화는 개봉 일주일 만에 ‘엔(N)차 관람’(반복관람) 열풍을 일으키며 1만3천명(8일 기준)을 돌파했다. ‘1만’은 독립영화계에선 흥행을 위한 1차 고지로 불린다. 더구나 이는 청소년관람불가라는 핸디캡을 극복한 결과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씨지브이아트하우스상, 남녀 배우상), 서울독립영화제(관객상)의 호평으로 ‘평단의 검증’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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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제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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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과 실력이 합쳐진 ‘승승장구’처럼 보이지만, 사실 감독에겐 외로움과 싸우는 과정이었다. “사무실 운영, 캐스팅, 스태프 섭외까지 모든 걸 맨땅에 헤딩하듯 혼자 해야 했어요. 외로움은 결국 공포로 바뀌더군요. 내가 과연 이 영화를 완성할 수 있을까? 그때 깨달았어요. 가능성 있는 독립영화를 망가뜨리는 것이 바로 이 공포라는 것을.” 든든한 지원군인 배우들이 합류하고 나서야 공포는 다소나마 극복됐다.
조 감독은 자신의 1인 제작사를 가능하면 유지하고 싶다고 했다. 공포와 싸우는 다른 감독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 싶어서다. 제작사 이름인 ‘서울집’은 그의 첫 단편 제목이기도 하다. “<꿈의 제인>이 그렇듯 제겐 이방인 정서가 있어요. 부유하며 잠시 머무는 공간이랄까? 진주 출신인 제가 서울에 내 집 한 번 가져본 적 없고, 그러다 보니 언제나 한발 떨어져 이 도시를 보게 돼요.” 집 이야기가 나오자 한마디를 보탰다. “아, 영화 찍으며 그나마 남아 있던 전세 보증금마저 뺐네요. 하하.”
그는 이 영화가 가출팸이라는 특별한 소재에 갇히지 않고 보편적인 이야기로 다가가길 바란다고 했다. “누구나 예기치 못한 불행을 겪지만, 쉽게 포기하면 안 된다며 제인이 건네는 사소한 위로” 말이다.
독립영화에서 상업영화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를 성공적으로 건너는 감독이 한국엔 흔치 않다. 류승완·정윤철 감독 등 손으로 꼽을 정도다. 조 감독은 그 징검다리를 건널 욕심도 조심스레 비쳤다. “다음 시나리오가 재난을 당한 가족이 국가 시스템 부재 속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이야기예요. 혼자 찍기는 무리죠. 제 자신에 대한 동기부여 차원에서라도 새 환경 안에서 작업해 보고픈 욕심은 있어요.”
■ 극장에 걸린 학교 졸업작품…‘용순’ 신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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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순>의 신준 감독이 8일 오후 서울 마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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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순>은 원래 감독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졸업작품이었다. 젊은 프로듀서 모임인 제작사 ‘아토’의 김지혜 프로듀서가 상영회 때 우연히 이 작품을 보고 ‘은밀한 제안’을 해왔다. 25분짜리 단편을 장편으로 탈바꿈시키자는 것. 그게 ‘개고생’의 시작일 줄이야.
신준(31) 감독은 “영화를 준비하는 내내, 위기가 턱밑까지 차오른 순간 돌파구가 열렸다”고 했다. 원래 ‘아토’의 창립작이었는데 시나리오를 고쳐 쓰다 보니 밀리고 밀려 무산되나 싶었을 때, 영진위 지원금을 받으며 기적적으로 촬영에 돌입했다. 촬영기간 내내 비가 한 번도 안 왔는데, 비 내리는 신을 찍어야 하는 날 딱 하루 폭우가 쏟아졌다. 롯데가 저예산 영화를 활성화한다며 독립영화에 관심을 가진 시기와 맞아떨어져 후반 작업과 배급에 도움을 받았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대명컬처웨이브상을 받은 것은 영화의 인지도를 높였다. “영화도 ‘팔자’라는 게 있는데, <용순>은 결국 개봉할 운명이었나 봐요. 주변에선 천운을 이 영화에 다 쓴 것 아니냐는 농담까지 하더라고요. 히히.”
<용순>은 맑고 청량한 영화다.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 열여덟 용순이 겪는 가족과의 갈등, 그리고 여름보다 더 뜨거웠던 체육 선생님과의 첫사랑을 담았다. 넓은 자갈밭, 얕지만 맑은 강물, 파란 하늘과 푸른 산줄기가 어우러진 수려한 풍광에 눈이 시리다. 충청도를 배경으로 한 만큼 “~할껴?” 같은 구수한 사투리도 정겹다. “사실 충북 옥천군 안남면 지수리 대청댐 상류 로케이션은 딱 1박2일이었어요. 돈이 없어 나머지는 파주 등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에서 찍었죠. 매주 경기도 일대를 샅샅이 뒤지는 게 감독의 제일 큰 임무였어요.”
대부분의 독립영화가 그렇듯 <용순>을 찍는 과정 역시 ‘눈물 어린 읍소’가 8할이었다. 이수경(용순), 김동영(빡큐), 몽골 출신 배우 얀츠카(용순 새엄마) 등을 캐스팅할 때부터 “제발 한 번만 찍자”며 사정했단다. 감복한 탓일까? 배우들 모두 출연료 없이 영화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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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순>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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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으니 배우·스태프가 모두 고생이었죠.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는 돈까지 일일이 계산하고 잔고 확인하며 썼으니까요. 저는 매일 촬영장까지 배우·스태프 출퇴근 차량을 운전했어요. 그렇게라도 고통을 분담하고 싶었죠.”
관객이 눈치챌지 모르겠지만, 영화에는 세월호를 추모하는 감독의 ‘작은 마음’도 담겼다. 체육실 창고 문에 그려진 노란 리본, 용순의 마지막 뜀박질에서 초시계에 남은 ‘0416’이라는 숫자는 깨알 디테일이다.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하는 모든 과정이 세월호 추모 기간과 겹쳤어요. 고교생 이야기를 다루며 세월호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을 도리가 없더라고요.”
아직은 극장을 지날 때마다 <용순> 포스터를 확인하고, 하루 500명 예매에도 기쁘기만 하다는 신 감독. “부산영화제부터 오늘까지 8번 관람한 관객이 있어요. 그분이 트위터로 홍보해주고, 악플엔 대신 대응도 해주시는데, 성적이 어떻든 그런 분이 계시니 독립영화 계속할 맛 나더라고요. 히히.”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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