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7.05.29 08:00 수정 : 2017.05.29 08:31

3D 모델링 이용해 배경·캐릭터 구축

송래현 작가 웹툰 ‘그녀의 시간’
건축 프로그램 활용해 골목 사진을 배경으로
천계영 작가 ‘좋아하면 울리는’
캐릭터 하나를 변주해 여러 사람으로 표현

과장해서 말하면 이제 만화가들은 만화를 그리지 않는다. 프로그램에 입력한 그림을 캡처한다. 사건의 흐름에 맞게 이 그림을 배열하면 만화가 된다. 만화를 그리는 방식도 만화를 보는 방식도 바뀌고 있다. 모바일로 옮겨온 만화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고 나에게 전화를 걸기도 한다. 지금 가장 팽창하는 산업인 웹툰은 노동의 신세계, 경험의 신세계를 열어젖히고 있다.

경기도 부천의 한 공동작업실에서 송래현 작가가 펜과 태블릿,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화를 그리고 있다.
경기도 부천시 한 만화가 공동작업실. 송래현 작가가 손으로 마을 하나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다. 줌인해 들어가면 연인이 자주 만나는 생고깃집 앞이 나오고 거리를 죽 따라가면 주인공이 사는 카페의 이층집이 나온다. 이층집으로 들어가면 그곳에는 아내를 잃은 주인공이 슬픔에 잠긴 창문 넓은 방이 나타난다.

인천의 집과 합정동 집이 나란히 송래현 작가는 웹툰 <그녀의 시간>을 그리려고 마을 하나를 세웠다. 고깃집은 서울 이태원에서 왔고, 주인공이 사는 이층집은 합정동의 집을 리모델링했다. 인천의 송현동, 부천의 원미동, 서울 연희동·삼청동의 집들이 어깨를 맞대고 길거리를 형성한다. 사진 취미를 가진 송래현 작가가 카메라를 들고 출사를 가서 찍어온 사진들을, 건축 분야에서 주로 사용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작업해 마을로 만든 것이다. 주인공의 방 또한 평면도에 가구를 배치해 3D로 구현된다. 날짜와 시간을 입력하면 빛이 창문가 소파에 누운 주인공의 몸에 ‘정확하게’ 떨어진다. 만화가의 정밀한 손끝에서 창조되던 배경그림이 컴퓨터를 통해 손쉽게 구현되는 것이다.

서울 와우산로(합정동) 건물 사진(맨 위)과 스케치업 프로그램을 통해 작업한 그림(가운데), 옆 건물과 어울린 거리 모습. 송래현 작가 제공
부천만화영상진흥원에서 ‘3D 모델링’을 강의하는 송래현 작가는 이런 마을을 만들 때 학생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다른 작가와 연합하기도 한다. 개인만으로는 힘에 부치는 공간을 협업을 통해 완성하는 것이다. 15명이 만든 마을도 있고 6~8명이 만든 마을도 있다.

최근 연재를 시작한 강풀 작가의 <브릿지>에 나오는 서울 암사동 사거리도 강 작가가 팀을 꾸려 컴퓨터에서 구축한 공간이다. 암사동 사거리의 싱크홀은 ‘한국형 영웅’의 존재를 알리는 중요한 공간이다. 버드아이뷰의 사거리, 보행신호를 기다리는 거리의 사람들, 그 인물을 비추는 시시티브이(CCTV)는 컴퓨터 내에 구축된 공간을 캡처해서 만들어졌다.

조조·굴미·혜영 엄마는 모두 한 사람 컴퓨터 속에 구현되어 있는 것은 마을 풍경뿐만이 아니다. 천계영 작가는 아예 캐릭터를 ‘돌린’다. 2018년 드라마로 선보일 예정인 <좋아하면 울리는>의 캐릭터들이 그렇다. 작가는 만화 연재를 시작하기 전 ‘시네마4D’(3D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의 하나)를 이용해 캐릭터를 완성했고, 연재를 하면서는 콘티에 따라 이미 그려진 하나의 캐릭터를 여러 등장인물로 변신시키고 있다. 천 작가는 지난해 7월 <좋아하면 울리는> 시즌5를 시작하면서부터는 ‘마감 생중계’를 한 차례 했다. 어떻게 프로그램을 이용해 만화를 그리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그는 프로그램 안에 미리 만들어져 있는 ‘오브제’를 이용하여 방송국 세트장을 구현했다. 세트장에 있는 엑스트라들은 인원수와 그들 사이의 간격 등을 조절할 수 있다. 엑스트라가 무작위로 움직이도록 설정하면 각각의 엑스트라에게 일일이 행동을 지정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인다. 이미 구축된 캐릭터를 데려와 움직임과 표정을 줘서 ‘렌더링’(동작을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면 만화의 한 장면이 만들어진다. 천 작가는 당시 생중계 때 등장인물인 주인공 조조와 굴미, 혜영 엄마가 모두 키와 몸매가 동일하다는 ‘천기누설’도 했다. 동일한 3D 캐릭터에 얼굴과 눈, 머리모양을 바꿈으로써 서로 다른 캐릭터를 표현해낸 것이다. 선오, 혜영, 막스 또한 하나의 3D 캐릭터다. 인형놀이를 하는 것처럼 옷을 갈아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팔 등을 구부려서 각기 다른 동작을 만든다. 캐릭터를 세련되게 보여주는 각도 또한 캐릭터를 마우스로 돌리면 자연스럽게 나온다.

천계영 만화가의 <좋아하면 울리는> 작업 과정. 유튜브 화면 캡처
움직이고 소리내는 웹툰 네이버웹툰은 지난해 10월 에이아르(AR·증강현실)툰을 선보였다. 3화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폰령>은 휴대전화라는 물리적 도구를 이용해 공포감을 극대화한다. 휴대전화 카메라가 비추는 화면에 귀신을 앉히거나, 전화가 걸려오는 상황을 리얼하게 묘사했다.

클립스튜디오를 통한 작업(왼쪽)을 만화에 적용한 모습(오른쪽). 송래현 작가 제공
‘공포웹툰’은 진화된 기술을 선보이는 장이 되어왔다. 2011년 <옥수역 귀신>(호랑)은 귀신이 보는 사람을 향해 움직여오는 ‘움짤’로 웹툰 뷰어를 경악으로 몰아넣었다. 네이버웹툰에서는 만화가들이 쉽게 효과를 넣을 수 있는 툴인 에디터를 제공한다. <악의는 없다>(환쟁이·2015년)에서는 사이코패스의 으스스한 웃음을 로고마다 삽입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고고고>(하일권·2015년)에서는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달라지는 효과로 애니메이션 같은 재미를 준다. 네이버웹툰 차정윤 차장은 “웹툰 자체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탄생해서 기술의 자장을 벗어날 수 없다”며 온라인·웹·모바일과 만화의 친화성을 강조한다.

책 <표현의 기술>의 정훈이 만화. 생각의길 펴냄
기술보다 인간이 중요해졌다 정훈이는 최근 유시민 작가와 펴낸 <표현의 기술>에서 다양한 ‘컨트롤 시(ctl+C)·컨트롤 브이(V)’를 통해 완성된 한 컷 만화를 보여준다. 그림을 하나 그린 뒤 이를 회전시키거나 확대·축소해 각 컷에 배치하고, 말풍선을 넣어 만화를 완성한 것이다. 이 만화를 보고 편집자는 “얼마나 그리기 싫었을까, 마감시간은 다가오고”라고 말한다.

천계영 작가는 “반복된 작업을 벗어나고 싶어 3D 프로그램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엇비슷한 컷을 일일이 그리는 대신, 복사하고 일부를 변형하는 손쉬운 작업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천 작가는 만화를 일주일에 2회씩 연재하는 어머어마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송래현 작가는 기술이 다양한 웹툰이 만들어지는 바탕이라는 진단도 덧붙인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완성도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려면 숙련 기간이 2~3년씩 필요했다. 요즘에는 2주, 길어봤자 두달만 프로그램을 익히면 자신의 스토리를 그림으로 구현하는 일이 가능하다. “프로그램 덕분에 게이머, 세일즈맨 등 삶의 궤적이 다른 사람들이 만화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만화의 소재와 내용이) 더 다양해졌다”는 게 송 작가의 생각이다.

최근 한 대학의 만화학과는 만화 관련 학과를 공과대학에 넣는 학제 개편을 논의하기도 했다. 만화를 예술로 보는 관점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만화의 힘은 기술보다 인문학에서 나온다는 송 작가의 말은 귀 기울일 만하다. “기술 덕에 만화 스토리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인간 고유의 역할인 이야기가 더 중요해졌다.”

글·사진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