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4.10 16:56
수정 : 2017.04.10 20:11
스물아홉 발레리노의 이야기 담은 다큐 영화 <댄서>
발레의 엄격한 미적 규범과 무용수가 충돌하면 그 결과는 무엇일까?
발레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보여주면서 이런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 영화는 아직 없었다. 왜냐하면 무용수의 욕망과 발레의 욕망은 공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용수가 총체적인 자신을 드러내려 하면 발레를 포기해야 하고, 발레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발레 안에서 자신을 접고 조용히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게 숙명이다. 다큐든 아니든 대부분의 발레 영화는 적당한 선에서 발레리나의 인간적인 면을 다루고 그들이 눈물을 삼키며 인간적 욕망을 접는 숭고한 결론(?)을 내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댄서>는 바로 이 숙명을 뚫고 어떻게 다른 길을 찾아가는지를 한 젊은 댄서의 실화를 통해 매우 담담히, 발레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으면서 보여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인공인 세르게이가 갈등 끝에 은퇴와 번복 과정을 겪었지만 현재 스물아홉의 앞길이 창창한 발레리노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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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댄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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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시골의 가난한 가정에서 날 때부터 ‘턴 아웃’(발레 기술에 유리하게 골반 안 대퇴골두가 바깥으로 돌아가 있는 것) 상태로 태어난 세르게이. 5살 무렵 체조에서 발레로 전환하는 과정, 발레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자 교육에 열성적이었던 엄마의 판단으로 가게 된 영국 로열발레학교 유학 등 어릴 때부터 엄마가 계속해서 찍어온 영상은 그의 천재성이 성장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하지만 애초 계획과 달리 비자 문제로 엄마가 영국에 함께 체류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의 가족은 해체 상황에 놓인다. 부모와 양가 할머니들은 유학비를 벌기 위해 제각기 떠나고, 그에 이어진 부모의 이혼은 사춘기의 세르게이에게 타격을 준다. 예상대로 그는 로열발레단에서도 최연소 주역 무용수가 되었지만 점차 그는 성실한 사람들이 더 빨리 겪게 마련인 어떤 한계 앞에 선다.
가난, 그것과 늘 붙어 다니는 가족의 희생, 그 희생의 무게감을 묵묵히 감당해내는 선한 소년, 고생하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외로움을 삼킬 줄 아는 소년의 동작은 날이 갈수록 깔끔하고 정교해진다. 그러나 외국인 주역 무용수에게 쏠리는 언론의 예민함에 점차 상황은 어려워지고, 아픔을 또 다른 아픔으로 덮으려는 듯 그의 몸은 문신으로 빈 곳이 사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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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댄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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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가수 호지어의 록 음악 ‘테이크 미 투 처치’(Take me to church)에 맞춘 세르게이 폴루닌의 솔로는 단연 눈길을 끈다. 갈등 끝에 로열발레단을 탈단하고 러시아의 무용단으로 적을 옮겨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지만, 결국 은퇴를 결정하면서 준비한 마지막 춤이다. 하와이의 초록이 눈부신 공간에서 이 춤이 촬영되던 9시간 동안 그는 자신만의 의식을 치르듯이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한다. 슬픔과 눈부시게 밝은 생명인 초록이 충돌하는 이 춤은 제의의 느낌이 살아있는, 처연하고 아름다운 춤이다.
눈여겨봐야 할 또 하나의 춤은 마지막 부분 영국 안무가 러셀 말리펀트가 안무한 춤이다. 앞의 춤이 흰 타이츠와 걸맞은, 눈부시게 밝은 공간의 춤이었다면, 이 춤은 낮은 조도의 극장 무대에서 검은 타이츠만 입고 추는 춤이다. 앞의 춤이 울음을 담은 놀라운 도약과 테크닉의 만찬이라면, 마지막 춤은 고통과 갈등을 헤쳐 나온 성숙하고 정화된 춤이다. 작위적이지 않고, 과장이 없는 단순한 안무로 ‘사람’을 드러내는 여백의 안무와 그것을 시적으로 적셔 나가는 세르게이의 춤은 그가 이미 발레를 넘어서고 있음을 춤으로 보여준다. <댄서>가 발레를 넘어 ‘사람’과 동의어가 되는 순간이 화면을 채운다.
이지현 춤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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