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10.04 11:32
수정 : 2016.10.04 11:50
[새 연재] 이용철의 ‘별점왕’
미디어에 영화에 관한 글을 기고한 지 20년 가까이 된다. 영화전문지에 영화에 대한 점수를 매기고 20자 정도로 짧은 영화평을 보낸 지는 10년쯤 된다. 그동안 별점을 매긴 영화가 1500편쯤 되니 20자짜리 영화평을 물경 3만자를 흘린 셈이다. 3만자라 해봐야 어지간한 길이의 비평 몇 편의 분량에도 못 미치지만 그럼에도 평론가 이용철의 이름은 주로 별점과 단평으로 거론된다. 게다가 나는 별점을 짜게 주는 평자로 알려져 있다. 아무리 20자평이지만 ‘짜다’는 것이 비평의 특성이 될 수 있을까? 짜게 주는 게 뭐 대단한 일인가, 점수만 깎으면 될 일 아닌가. 빤하고 평범한 영화를 빤하고 평범하게 평가하는 건 쉬운 일이다. 안일하게 평할 마음이 없을 뿐,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다.
내 이름을 딴 봇을 만들어 내가 매긴 점수나 평론을 전파하는 호의적인 독자도 있지만 별점 때문에 공격을 받은 일이 훨씬 더 많다. 그가 만든 영화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했다는 이유로 감독들에게 인터뷰를 거절당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기다란 비평으로 영화를 평했다면 거절이 좀더 길고 예의 발랐을까. 독자들의 원성도 적지 않았다. 특히 ‘천만 영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가는 적어도 ‘백만 안티’가 덤비는 느낌을 받게 된다.
별점은 영화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방식 중 하나다. 한국에서만 사용되는 게 아닌 것이, 세계의 평론가와 시네필이 구독하는 미국의 계간지 <필름 코멘트>에서도 오래전부터 별점으로 영화를 사전 평가해왔다. 세계 영화제에서 처음 소개되는 영화에 점수를 매길 때도 종종 별점이 사용된다. 평가하는 사람의 기준과 영화에 대한 첫번째 느낌으로 이루어지는 빠른 비평 행위에서 근거를 모두 밝힐 여유는 없다. 그러나 요즘엔 한 영화에 대해 말할 기회가 이게 전부일 때도 많다. 읽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리뷰와 긴 비평이 줄어들면서 마치 별점이 영화를 평가하는 대표적인 방식인 것처럼 취급되고 있다. 별점은 빨리 읽고 간편하게 판단하길 좋아하는 관객을 현혹하는 미끼다.
다른 평론가도 그렇겠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의 대중성은 어느 정도 짐작 가능하고 내가 이 영화를 혹독하게 말했을 때 대중들의 반응도 상상할 수 있다. 욕먹을 줄 미리 알았다고 해서 별을 하나 더하거나 뺄 수 있었을까? 평가는 대중성이 아니라 영화의 작품적 가치에 대한 척도다. 평단의 평가와 대중들의 반응이 종종 비교당하는 건 그런 까닭에서다. 안타까운 건, 돌아올 피해가 두려워 전문가라는 인간들이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만 써대는 현실이다. 이해가 가면서도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다. 관객이 그들의 평가를 왜 불신하는지 따져봐야 한다. 단언하건대 내 별점과 단평엔 욕먹을 걱정을 반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무리 영화의 제작자와 관객들의 미움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건 아무나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내 영역이다.
별점과 단평에 대한 주석을 덧붙이는 ‘별점왕’이라는 칼럼을 시작한다. 뻔뻔하거나 구차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별점왕은 평론가로서 내 자존의 이름이며 이해를 도모하는 행위다. 한 줄짜리 단평이 평론으로 받아들여지는 시절이 슬프지만 주석을 더함으로써 적어도 오독은 피하고자 한다. 별점은, 한 해에 영화 한두 편 보는 관객보다는 영화 보기를 일상의 취미로 삼는 관객을 위한 것이다. 그들이 보고 기억할 영화를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영화 보기의 기준을 제공하고 한편으로 그 자체로 시가 되고 예술이 됐으면 싶다. 그런 뜻을 이해받기를 원한다. 그게 별점왕의 꿈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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