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9.27 12:27
수정 : 2016.09.27 16:18
권여선의 ‘인간 발견’/ 영화 <최악의 하루> ‘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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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하루>의 여주인공 은희(오른쪽, 한예리). ㈜인디스토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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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하루>에서 은희라는 귀여운 여자를 만났다. 영화에서 일본 소설가 료헤이는 은희를 ‘프리티’하다고 한다. 남자친구 현오는 은희를 ‘귀여우면 다냐’고 타박하며, 옛 애인 운철은 그를 안으면서 ‘쪼꼬맣다’고 감탄한다. 그 귀여움의 감촉은 관객에게도 생생하게 전해진다. 아름다움과 예쁨과 귀여움은 각기 그 층위가 다른데, 아름다움이 멀고도 높다면, 예쁨은 눈높이와 비슷하다. 귀여움은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눈 아래 놓이는 대상을 향한다. 그래서 귀여움을 받는 쪽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할 것 같은, 의존적이며 종속적인 감정상태에 놓인다.
은희의 원조 격으로 안톤 체호프의 소설 <귀여운 여인>을 꼽을 수 있다. 소설 속 올렌카는 두 번의 결혼과 한 번의 연애에서 남자에게 완전히 동화된다. 극장지배인에서 목재상으로, 또 수의사로 남자가 바뀔 때마다 그의 말과 생각이 바뀌는 건 모순이 아니다. 자신을 귀여워하는 시선에 응답하는 것이다. 은희 또한 현오와 운철을 만날 때 전혀 다른 말과 태도를 구사하는데, 이것 역시 거짓이나 위선이라기보다 두 남자가 원하는 것을 각자에게 충실히 돌려주고 있는 중이다.
이런 ‘욕망의 돌려주기’는 ‘욕망의 흉내내기’로 나아가는데, 이 지점에서 소설과 영화가 절묘하게 겹친다. 올렌카는 그녀의 집에 세들어 살던 극장지배인과 결혼한 뒤 사람들에게 “관중이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요구하는 건 광대예요”라고 남편의 말을 똑같이 되풀이한다. 은희는 운철과 얘기를 나누다 불쑥 “저도 병신 같은 거 알아요. 저는 오죽하겠어요?”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조금 전 그녀가 현오에게 들었던 말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다. 귀여운 자는 자기를 귀여워하는 자의 욕망을 흉내냄으로써 자기 욕망의 미숙함과 공허함을 감춘다.
흥미로운 것은 이 흉내를 통해 드러나는 게 귀여운 자의 허위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올렌카의 말을 통해 우리는 극장지배인이 혼자 고상한 예술가인 척하지만 실은 흥행에 목숨 걸고 있는 속물임을 알게 되고, 은희의 말을 통해서 현오가 과대망상과 자기비하 사이를 오가는 불안증 환자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귀여운 여인은 남자들의 허위의식을 우스꽝스럽게 재현해 보여주는 스크린이 된다. 그래도 남자들의 자만심을 채워주기에 여자의 귀여움만큼 손쉬운 덕목은 없으므로, 그들은 귀여운 여자에게 매달린다. 남자들은 혹시 이 귀여움을 타인과 공유하는 건 아닌가 하는 끝없는 불안과 의심에 시달려야 한다. 귀여운 여자들의 비극은 무엇인가? 귀여워하는 시선이 사라진 뒤에 그녀들은 어떻게 되는가?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의 결론은 자리바꿈이다. 올렌카는 귀여움을 받던 자리에서 귀여워하는 모성의 자리로 옮아갔다. 그렇다면 은희는?
<최악의 하루>가 제시한 ‘해피엔딩’은 뜬금없고 모호하다. 엔딩 신에서 은희는 눈이 내리는 겨울 산책로에 홀로 서 있다. 이야기의 안도 밖도 아닌 기묘한 공간에 던져진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다. 눈이 내리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어쩐지 나이 들어 보이고 헐벗은 겨울나무처럼 귀여움을 벗어버린 듯 보인다.
살다 보면 문득 돌아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고독한 정지의 순간이 찾아온다. 내게는 그 순간이 모든 이야기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처럼 여겨진다. 앞으로 연재할 <권여선의 인간 발견>에선 스크린을 통해 그 순간에 멈춰 선 인물들을 많이 만나고 싶다.
소설가
※영화 속 캐릭터를 통해 이야기의 새로운 의미를 탐구하는 권여선의 <인간 발견>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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