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7.13 10:05
수정 : 2019.07.13 13:40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오브더티브이
리얼리티 예능 적정선은
누구나 아는 리얼리티 예능 비밀
‘100% 실제 상황은 없다’는 것
그래도 즐기는 건 적정선 지킨 덕
타이 동물보호법 위반 ‘정글의 법칙'
LA 한인 막은 ‘현지에서 먹힐까'
진짜 세계 무시하다 논란 휩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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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같은 판타지’를 보여주는 리얼리티 예능의 적정선은 어디까지일까? 에스비에스(SBS)의 <정글의 법칙>이 최근 타이 국립공원 섬에서 멸종위기종 동물을 사냥하는 장면을 방영해 현지법 위반 논란을 빚고 있다. 에스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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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송(MBC) <무한도전>이 ‘국내 최초 리얼 버라이어티’를 표방하며 등장한 지 14년, 아직도 리얼리티 예능이 순도 100%의 실제 상황을 보여준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떤 리얼리티 예능이든 제작진이 사전에 구상했던 그림이라는 게 느슨하게나마 있는 법이다. 제작진은 그 그림을 건지기 좋은 환경을 세팅한 뒤 상황 속으로 출연자들을 밀어 넣는다. 물론 출연자들의 생생한 반응이나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변수 같은 것들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제작진이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쇼를 끌고 갈 때도 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메인 진행의 역할을 맡은 멤버는 녹화에 들어가기 전 어느 정도 상황을 공유받거나 진행용 대본을 받으며, 쇼가 지나치게 원래 그림과 멀어지는 순간 개입해 상황을 다시 정상 궤도에 올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혹시라도 촬영 중 제작진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돌발변수나, 제작진이 판단하기에 방송에 내보내기 애매하다 싶은 순간이 생기면 그 부분은 편집 과정에서 잘려 나간다. 최종적으로 전파를 타는 것은 제작진이 매끈한 플롯으로 재구성한 서사다. 촬영 전에도, 촬영 현장에도, 촬영 후에도 ‘원하는 그림’을 만들고자 하는 제작진의 지속적인 개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개입하되 들키지 말라
리얼리티 예능 제작이 까다로운 이유 중 하나는, 이 원하는 그림을 만들고자 하는 제작진의 의도가 너무 눈에 보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시청자들 또한 어느 정도 연출자와 작가, 스태프의 개입이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제작진이 너무 대놓고 매끈한 픽션을 선보이면 바로 ‘조작방송’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한다. 개입해서 상황을 만들어야 하면서도, 그 개입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이 게임의 룰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실제 상황을 담으면 예능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그렇다고 완전히 제작진의 의도대로 상황을 가져가면 ‘리얼리티’라는 특성을 잃는 이 독특한 게임의 법칙. 결국 리얼리티 예능은 ‘진짜’를 보여주는 장르가 아니라, ‘진짜 같은 판타지’를 제공하는 장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무한도전>에서 에이치오티(H.O.T.) 재결성 공연에 필요한 비용을 전해 들은 박명수가 멤버들에게 간접광고(PPL) 상품으로 제공된 스포츠 음료수를 가리키며 “마셔”라고 말하는 장면은, 거액의 공연 제작비를 충당해야 하는 제작진의 상황을 반영하는 메타적인 농담으로서의 리얼리티를 지녔기에 시청자들에게 용인될 수 있었다. 반면 문화방송 <나 혼자 산다>에서 박나래가 친구 홍현희의 결혼을 축하하며 미니 건조기를 선물로 주는 장면은, 간접광고임을 숨기지도 못하면서 간접광고가 아닌 척을 하려고 한 탓에 시청자들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진짜 같은 판타지의 적정선은 이처럼 지키기 어렵다.
장르의 역사가 10년 넘게 쌓인 덕에, 이제 이 적정선을 지키지 못해서 논란이 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시청자들은 제작진의 개입을 어느 정도 감안하고, 제작진은 시청자들이 즐길 수 있는 판타지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가끔, 시청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했던 진짜 같은 판타지가 현실세계의 ‘진짜’와 충돌하는 순간 문제는 커진다.
이를테면 지난달 29일 방영된 에스비에스(SBS) <정글의 법칙 인 로스트 아일랜드> 편을 보자. 타이 남부 핫짜오마이국립공원 안 꼬묵섬에서 생존활동을 벌이던 출연자 중 한 명인 배우 이열음은, 멤버들과 함께 먹기 위해 대왕조개 세 마리를 채취했다. 문제의 조개는 남획으로 인해 수가 급감한 탓에 1992년부터 타이에선 야생동물보호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멸종위기종이었다. 타이 현지 언론인 <피비에스>(PBS)가 공개한 공문에 따르면, <정글의 법칙> 제작진은 타이 관광스포츠부에 촬영허가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타이에서 사냥하는 장면을 촬영하지도 방송하지도 않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물론 이열음은 그 사실을 몰랐고, <정글의 법칙> 시리즈가 늘 그랬던 것처럼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는 음식을 채취해 왔을 뿐이다. 저간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었을 제작진은 다 알면서도 수중카메라와 잠수부를 동원해 이열음이 대왕조개를 채취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정글의 법칙> 제작진이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진짜 같은 판타지는 분명 “인간의 문명이 많이 침범하지 않은 오지에서 멤버들끼리 자력으로 먹거리를 조달하고 외부의 위험요소로부터 스스로 보호할 것들을 갖추는 생존과정”이다. 그 판타지를 제공하기 위해, 제작진은 애초에 자신들이 사냥 장면의 촬영을 허가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기고, 사냥 활동을 해선 안 된다는 규정을 알면서도 어겼다. 현지 언론이 공문을 공개하기 전까지 제작진은 촬영 과정에서 불법적인 부분은 없었다고 주장하거나, “현지 규정을 사전에 충분히 숙지하지 못하고 촬영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했다. 이 또한 시청자들에게 끝까지 자신들의 촬영에서 거짓이 없었음을 강변하려다가 생긴 헛발질이다. 결과적으론 진짜 같은 판타지를 지키기 위해 현실세계 속 진짜인 현지의 법령과 관습을 훼손한 끝에, 애꿎은 출연자 이열음만 국립공원법 위반과 야생동물보호법 위반으로 타이 경찰에 고발되는 상황이 생겼다. 핫짜오마이국립공원 책임자가 제작진의 사과에도 이 사건은 엄연한 형사사건이며 고발을 취하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현실세계의 진짜가 리얼리티 예능의 진짜 같은 판타지를 위해 희생되거나 제자리를 양보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한인 한 명도 없는 엘에이?
<정글의 법칙>보다는 한결 가벼운 이슈였지만, 티브이엔(tvN) <현지에서 먹힐까 미국편> 또한 비슷한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현지에서 먹힐까 미국편>은 중식의 대가 이연복 셰프와 일군의 연예인들이 미국 서부에서 한국식 중국음식을 판매하는 푸드트럭을 운영한다는 설정의 리얼리티 예능으로, 미국 현지인들의 입맛에 한국식 중국음식이 얼마나 어필할 수 있는지를 알아본다는 취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현지 한인들의 방문을 제작진이 막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방영 전부터 잡음이 일었던 바 있다. 담당 프로듀서는 한국 음식이 외국인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는 기획의도가 희석될 것을 우려해 내린 조치라고 해명했으나, 그럼에도 시민 405만여명(2018년 기준) 중 한국계 혼혈을 제외하고도 21만여명(2017년 기준)이 한인인 로스앤젤레스 시내에, 출연자들을 제외하면 한국인이 한 명도 없는 그림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한국식 중국음식을 먹어보고 감탄하는 미국인들”이라는 ‘진짜 같은 판타지’를 제공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가 미국 전역에서 한인 인구가 제일 많은 도시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이다. 또한 제작진은 ‘한국음식’과 ‘미국인’이라는 이분법으로 판타지의 구도를 짜는 과정에서, 이민자들의 아이덴티티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게 나눌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피해간다. 엄밀히 따지면 이연복 또한 중국계 한국인 2세대인데, 프로그램은 그를 ‘코리아 넘버원 셰프’라고 수식한다. 같은 기준이라면, 로스앤젤레스 현지의 한인들이 모두 한국식 중국음식에 익숙하다고 간주할 이유나, 그들을 미국 현지인으로 대우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질문은 다시 “‘진짜 같은 판타지’의 적정선은 어디까지인가?”로 돌아온다. 시청자들에게 진짜 같다고 느낄 법한 근사한 판타지를 보여줄 수만 있다면, 현실세계의 법령과 규칙과 실상 따위는 무시되어도 좋은가? 진짜 같다는 판타지는 어디까지나 실체로서의 진짜가 훼손되지 않을 때, 판타지가 흉내 내고자 하는 원본으로 기능할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관념이다. 리얼리티 예능을 만드는 제작진에게는 나쁜 소식이겠지만, 진짜 같다는 판타지를 위해 진짜를 훼손하는 일이 자꾸 벌어지다 보면, 결국 그들의 시대도 함께 저물 것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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