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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21 16:18 수정 : 2019.06.21 20:16

황진미의 TV 톡톡

이것은 먼저 온 미래이다.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WWW>(검블유, 티브이엔)는 한국사회가 아직 도달하지 못했지만, 지향해야 될 사회상을 선취하여 보여준다. 하지만 판타지는 아니다. 실제로 포털업체의 조직문화는 일반회사와 사뭇 다르며, 트위터에는 드라마 속 인물들처럼 ‘쿨’하게 말하는 인간들이 한 가득이니까. “미래는 여기 있다.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을 뿐이다”라는 말처럼, 드라마는 현실의 가장 앞선 영역에 존재하지만, 아직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삶의 형태를 보여줌으로써, 미래지향적 모델을 제시한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일단 회사의 고위직들이 모두 여자이다. 대형포털 ‘유니콘’을 업계 1위로 끌어올리는 데 청춘을 바쳤으나 방패막이로 이용당하고 해고된 배타미(임수정), 그를 이끌어준 선배였으나 이제는 원수가 된 송가경(전혜진), 유니콘 대표이사 나인경, 피도 눈물도 없는 케이유(KU)그룹 회장 장희은, 심지어 유니콘 본사의 대표까지 싹 다 여자다. 그뿐인가. 배타미가 경쟁사 ‘바로’로 옮겨 함께 일하게 된 차현(이다희)도 여자다. 남자는 가장 탈권위적인 바로의 대표이사 민홍주(권해효)가 유일하다.

세상에는 영화·드라마 산업에서의 성차별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벡델 테스트’가 있고, 이를 통과한 작품이 적을 정도로 여성캐릭터들은 부수적인 존재로 취급당해왔다. 하지만 <검블유>는 여자끼리 다 해먹는다. 이게 완전한 몽상은 아닌데, 실제로 포털업계는 여성임원 비율이 높다. 한국 500대 기업의 여성임원 비중이 2.3%인데 비해, 네이버는 대표이사도 여성이고 여성임원 비중도 14%나 된다. 물론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인 23%에는 크게 밑도는 수준이지만, 곧 임원이 될 경력의 여성들이 많이 포진해 있어 더 늘어날 전망이다. 여성임원의 비중은 조직문화에도 영향을 끼쳐, 포털업계는 상명하복 문화가 적다. 직책이나 직급을 최소화하고, 외국계 회사를 비롯한 몇몇 업체에서는 드라마에서처럼 영어 이름을 쓰기도 한다. 물론 현실이 드라마 같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검블유>는 현실의 일부에 존재하는 문화를 바탕으로, 대단히 진보적인 조직을 재현함으로써 앞으로 한국의 직장문화가 나아가야 할 바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드라마 속 회사가 진정 특별해 보이는 점은 자유주의와 합리주의와 개인주의가 넘실거리고, 전문성과 직업윤리를 갖춘 직업인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인정에 호소하거나 위계로 굴복시키려 들지 않는다. 냉철한 합리성을 바탕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믿는 원칙에 입각해 주장을 펼치고 옳고 그름을 가린다. 민홍주가 직원과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회사대표로서 취하는 조치들과 한계, 그리고 배타미가 위기의 순간에도 남과 동일한 기준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모습을 보라! 이들은 모두 유능하고 자존심이 강하며 성숙하고 윤리적인 인물들이다.

드라마가 다루는 핵심갈등도 흥미롭다. ‘포털 사이트는 검색어 순위를 조작 하는가’ 라는 화두를 놓고, 음모론이 아니라 공론장의 민주적 운영에 대한 갑론을박을 보여준다. 오늘날 포털은 가장 일상적으로 정보를 접하는 공간이다. 실시간 검색어는 무엇이 화제인지 알려줌으로써 여론의 방향키가 된다. ‘실검’ 순위는 이용자들의 관심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에, 포털회사가 손을 대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음란하거나 유해하거나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검색어는 순위에서 삭제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공론장과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원칙에 동의하더라도, 매 사안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두고 문제가 발생한다. 가령 대선후보의 불륜은 삭제되어야 할 검색어일까. 연예인의 호스트바 이력은? 일반인이지만 꽤 유명해진 자사 임원의 스캔들은 어떤가. 포털은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지만, 어떤 검색어를 순위에서 삭제할지 말지를 결정하거나, 어떤 검색어의 검색과정에서 일어나는 기술적 오류를 수정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만으로도 여론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드라마는 이런 과정에 정치권과 재벌의 이해관계가 개입되는 것을 보여주며, 민감한 질문을 던진다. 검색어 삭제 권한을 사기업의 운영자들에게 맡겨두는 것이 옳은가? 공공의 감시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드라마 속 젠더가 역전되고 섹슈얼리티가 확장되는 양상도 신선하다. 이성애 관계로는 배타미와 하룻밤 상대로 만난 열 살 연하의 박모건(장기용), 송가경과 호스트바에서 만난 한민규 등이 있다. 박모건은 배타미의 인맥에 의해 일자리를 잃거나 얻으며, 연예인이 된 한민규는 호스트바 경력이 탄로 나자 자살을 시도한다. 그동안 답습되어온 젠더 권력관계가 뒤집힌 거울상이 아닌가. 드라마는 이성애 관계보다 더 강렬한 여성들 간의 연대와 이를 넘어선 동성애적 긴장을 주저함 없이 그린다. 배타미, 송가경, 차현은 과거와 현재에 서로를 향한 끌림과 애증을 교환한다. 그동안 남근주의적인 로맨스에 갇힌 드라마들을 보며 입이 닳도록 지적해온 고질적인 문제들이 말끔히 사라졌을 뿐 아니라, 매회 엘리베이터 속 성추행범 응징, 성범죄자 정치인에 대한 일갈, 손님 외모 품평하는 남성 접대부 교육, 여자 둘이 외제차 작살내기 등의 ‘사이다’ 장면들을 방출함으로써 확실한 팬서비스를 제공한다. <검블유>가 성큼 내디딘 발걸음으로, 여타의 콘텐츠와 현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되어 보인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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