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우리동네 피터팬’과 ‘핑크 피쉬’
장애인의 꿈과 도전 담은
프로젝트 ‘우리동네 피터팬’
목요일 낮 12시25분 편성
홍어 요리의 현대적 재해석
다큐멘터리 ‘핑크 피쉬’
설 연휴 새벽 6시에 배치
이쯤 되면 조금 화가 난다
시청률, 광고수익 이유로
아무도 안 보는 시간대로 유배
시청자가 나서서 바꾸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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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송(MBC)의 장애 인식개선 프로젝트 <우리동네 피터팬>은 저마다의 꿈과 목표를 가진 장애인들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는 과정을 관찰 예능의 문법으로 풀어낸다. 문화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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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생각하면 화가 나는 프로그램들이 있다. 만듦새가 조악하거나 프로그램이 던지는 메시지가 유해해 보여서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이런 좋은 작품이 왜 좀 더 잘 안 알려져 있나 싶어서 화가 나는 프로그램들. 너무 좋은 프로그램이라서 할 수만 있다면 온종일 그 프로그램이 얼마나 준수하고 아름다운지에 대해서만 떠들고 싶은데, 마음처럼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 탓에 그처럼 오래 떠들 기회조차 얻기 쉽지 않은 프로그램들 말이다. 그처럼 좋은 프로그램이면 네가 좀 알리고 다니면 될 일 아니냐 싶겠지만, 그것도 내 마음처럼 되는 일은 또 아니다. 시청률이 잘 나오고 화제성을 모으는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이번주에 언급하고 다음주에 또 언급해도 아무도 나무라는 이가 없지만, 시청률도 잘 안 나오고 화제도 되지 않는 프로그램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독자 이전에 일단 매체 담당자들부터 난색을 표하는 법이다. “작가님, 아무래도 독자들이 생소해할 만한 프로그램에 대해 다루다 보면 독자들의 공감을 사기가 쉽지 않고….”
금요일 새벽에 보라고?
최근 만난 프로그램 중에는 문화방송(MBC) 장애 인식개선 프로젝트 <우리동네 피터팬>이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장애인을 비장애인들의 시혜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대상으로 묘사하며 은연중에 내려다보는 방송가의 오랜 관행을 탈피한 수작인 <우리동네 피터팬>은 저마다의 꿈과 목표를 가진 장애인들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사회와 부딪쳐가며 도전하는 과정을 관찰 예능의 문법으로 풀어낸다. 휠체어 럭비 선수로 활약 중인 박지은, 박승철, 박우철 삼남매의 활약을 다룬 에피소드는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경기의 박진감으로 가득하고, 한국 최초 장애인 패션모델을 꿈꾸는 김종욱씨의 도전을 따라가는 에피소드는 당당함과 스왜그가 넘치는 김종욱씨의 눈빛으로 보는 이들을 매료한다. 굿윌스토어에서 근무하는 이관태, 김현승, 윤승현씨 에피소드는 한편의 오피스 시트콤을 보는 것 같은 소소함으로 웃음을 자아낸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잠재력을 뽐내는 멋진 이웃들을 보여주며, <우리동네 피터팬>은 자연스레 시청자들의 상상을 유도한다. 비장애인 중심으로만 설계된 한국 사회가 좀 더 장애친화적인 곳으로 거듭난다면, 저들이 얼마나 더 멋진 도전을 해낼 수 있을까? 우리가 동료 시민으로서 연대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이 있을까?
비장애인 시청자를 당위로 설득하는 대신 자연스레 공감하도록 만들고, 장애인 출연자를 동정과 시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신 저마다의 꿈과 목표를 지닌 동료 시민으로 대하는 이 프로그램은 훌륭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다른 이들을 붙잡고 <우리동네 피터팬>을 보라고 권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프로그램의 본방송 시간은 목요일 낮 12시25분이고, 재방송 시간은 금요일 새벽 5시다. 장애인들이 사회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편견이나 고충을 다루는 프로그램이니, 사실 이 프로그램 시청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바로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회인들이리라. 그런데 정작 프로그램이 편성을 허락받은 시간대는,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대부분의 사회인에게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시간대인 것이다. 나는 좋은 프로그램이니 점심시간을 쪼개서라도 ‘본방사수’하라고, 그게 어려우면 금요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티브이를 켜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얼굴이 두껍지 않다. 준수한 작품을 만나고도 누구에게도 추천할 수 없으니, 이제 <우리동네 피터팬>이란 일곱 음절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천불이 인다.
광주 문화방송이 제작해 설 연휴에 전국에 방영된 3부작 다큐멘터리 <핑크 피쉬>도 그렇다. ‘홍어’라는 단어에 드리운 전라도 혐오와 차별의 정서를 홍어의 맛으로 뛰어넘겠다는 이 야심 찬 다큐멘터리는, 세명의 셰프 박찬일, 박준우, 남성렬과 함께 우리가 뻔히 안다고 생각했던 홍어 요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셰프들은 한국처럼 전통적으로 삭힌 홍어를 먹는 관습을 지닌 아이슬란드와, 프랑스에서 들여온 홍어날개 요리가 정착한 뉴욕을 직접 찾아가 그 지역의 홍어 요리를 맛보고, 미각을 기반으로 한 ‘홍어 연대’를 선언한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묻는다. 혹시 여기는 홍어를 혐오 단어나 욕설로 사용하는 사람은 없는지, 삭힌 홍어를 먹지 않는 지역에서, 삭힌 홍어를 혐오 식품으로 인식하고 홍어를 먹는 사람들을 비하하고 조롱하진 않는지.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슬란드에서는 비교 가능한 예가 없어요. 홍어가 사람들에게 욕설로 쓰이는 경우는 없거든요. 아마도 홍어 냄새 때문에 그렇게 사용되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아주 이상한 일이네요. 맛있는 음식인데….”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조상들의 생활방식을 존중해요. 삭힌 홍어를 하찮게 보지 않죠. 혐오가 낄 자리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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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 요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문화방송(MBC)의 3부작 다큐멘터리 <핑크 피쉬>. 문화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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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화 관객들이 살린 것처럼
당위도 당위지만, <핑크 피쉬>는 무엇보다 소소한 재미로 가득한 프로그램이다. 한국 외에 홍어를 먹는 나라가 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즐거움부터, 식재료 연구를 핑계로 원없이 현지의 홍어 요리를 먹는 셰프들을 보며 키득거리는 즐거움, 박찬일, 박준우, 남성렬 세 셰프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홍어 요리를 보며 맛을 상상해보는 즐거움은 어지간한 푸드 채널의 요리 예능에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이처럼 근사하게 잘 만들어진 3부작 다큐멘터리가 편성된 시간대는, 설 연휴 기간인 2월4~6일(월∼수) 새벽 6시였다. 이쯤 되면 조금 화가 난다. 설 연휴 새벽 6시면 일어나서 차례 준비에 여념이 없거나, 아직까지 이불 속에 있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이른 귀성, 귀경길에 오를 시간 아닌가. 설 연휴인 걸 떠나 단순히 휴일 새벽 6시라고 생각해봐도 그렇다. 세상 그 어느 누가 자다 일어나자마자 ‘먹방’ 프로그램을 본다는 말인가.
이해를 못 하는 바는 아니다. 시사교양 프로그램은 아무래도 예능이나 드라마처럼 높은 시청률을 올리기 어렵고, 시청률이 잘 나올 법한 시간대에 편성해준다고 해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낸다는 보장도 없다. 방송국도 땅 파서 장사하는 게 아닌데, 가능하면 목이 좋은 자리에 시청률이 잘 나오는 프로그램을 편성해 광고 수익을 극대화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편성 시간을 받아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편이, 아예 안 만드는 것보다는 백배 나은 일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처럼 프로그램의 존재 사실 자체를 알리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시간대에 편성된 채 고군분투 중인 작품들을 만날 때면, 나는 내가 왜 방송사 내부 사정 같은 것까지 고려해줘야 하느냐는 못된 생각에 사로잡힌다. 독립영화나 저예산 영화들을 아침 7시나 0시50분 같은 시간대에 유배 보내놓고 “우리는 다양성 영화 쿼터를 지키고 있다”고 말하는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 체인도 다들 저마다의 내부 사정이 있겠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대형 극장 체인의 탐욕을 비판해오지 않았나.
멀티플렉스의 비유를 들었으니, 해법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고민해보면 어떨까. 자본의 논리로 상영관들을 좀처럼 배정받지 못한 작은 영화들을 지켜낸 건 언제나 뜻을 모은 관객들이었다. 금방이라도 내려갈 상황에 놓여 있었던 <허스토리>(2018)를 어떻게든 더 오랜 시간 극장에 붙들어 매어둔 건 스스로 ‘허스토리언’이라 명명하고 끊임없이 대관 상영을 이어간 관객들이었고, <미쓰백>(2018)의 손익분기점을 넘긴 것 역시 ‘쓰백러’를 자처하며 영화를 홍보하고 다닌 관객들이었다. 물론 이게 근본 대책이 될 수는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온라인 다시 보기를 통해 늦게라도 프로그램을 만나고 환호하고 입소문을 내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방송사들에 어떤 신호를 보내는 일이 아주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이 글은 그 ‘신호를 보내는 일’의 첫 단계, <우리동네 피터팬>이나 <핑크 피쉬>와 같은 좋은 작품이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 쓰였다. 누군가 이 바통을 받아 이어 달려주시길.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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