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20.01.12 15:58
수정 : 2020.01.13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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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열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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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할아버지 ‘알란’
데뷔 26년 차 배우 배해선이 맡아
김성녀도 ‘파우스트’ 주인공 낙점
두세 배 노력으로 몰입도 살리며
‘금녀의 영역’ 경계·한계 허물어
배해선 “진짜 배우 되기 위한 모험
뒤따라오려는 후배들 있어 기뻐”
유행처럼 번지다 금세 꺼지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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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일단 가보는 거야.” 지난해 11월27일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2월2일까지) 속 100살 할아버지 ‘알란’이 힘차게 외친다. 잠깐, 할아버지가 아니다. 할머니인가. 여자 배우 배해선이 알란으로 처음 등장했다. 100살 노인은 소설에서도 ‘할아버지’다. 2018년 초연 때도 남자 배우가 맡았다. 이번 공연에선 주역의 성별을 허문 젠더 프리가 시도된 것이다. 남녀 구분 없이 누가 맡아도 되는 젠더 프리는 세계적 흐름이지만 한국에서는 최근 2~3년 사이 조역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금녀의 영역이라 여겼던 배역에서도 성별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가 2020년 새해와 함께 시작되고 있다. <창문 넘어…> 외에도 국립극단이 70돌 기념 공연으로 선보이는 연극 <파우스트>(4월3일~5월3일, 명동예술극장)에서도 처음으로 여자 배우인 김성녀가 주인공 ‘파우스트’를 연기한다. <창문 넘어…> 김태형 연출은 “주인공의 성별을 허물어야 진정한 젠더 프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래서 전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하하하.” 지난 3일 서울 대학로에서 만난 배해선은 호탕하게 웃었다. 한국 연극 100년사에 한 획을 긋는 주인공이 될지도 모르는데, 오히려 “그 의미가 더 빛날 수 있게 저보다 연기 잘하는 선배님이 해주셨으면 하고 바랐다”고 자신을 낮췄다. 흔치 않은 일인 만큼 배우가 제 몫을 잘 해내야 이런 시도가 계속 이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많은 이야기를 겪은 알란이 별것 아닌 것처럼 툭툭 내던지는 말들이 관객에게 신뢰감을 줬으면 해요. 좀더 연배가 있고 연기를 잘하는 선생님이 맡으면 듣는 사람에게 더 깊게 가 닿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공연 한달째. 걱정과 달리 배해선표 알란에 대한 반응은 뜨겁다. 알란이 원래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굳이 생각하지 않고 빠져들게 된다. “모든 걸 바쳐 연기했기 때문”이다. 성별을 구분 짓지 않는 배역은 여배우가 쏟아야 하는 에너지가 갑절 이상이다. 더구나 알란은 남자 배우인 오용과 번갈아 맡기에 균형을 맞추려면 배해선이 두세 배의 에너지를 뿜어야 한다. “그 무드와 기분이 나도록 해주지 않으면 장면이 살지 않아요. 남자 배우가 쓰는 에너지 두세 배를 써도 같은 레벨로 보이지 않아요.” 그는 “머리를 감을 때마다 매일 한 움큼씩 빠진다”고 모자를 벗어 보였다.
성별을 허문 배역은 공연 전체를 끌고 가는 역할을 많이 해본 배우만이 맡을 수 있다. 김성녀는 두말할 나위 없고, 배해선 역시 데뷔 26년 차 내공이다. 연극 <오이디푸스>에서 드물게 원캐스트(한 배역을 배우 한명이 맡음)를 했고, 1인극인 <그 여자 억척어멈>에서는 혼자 몇십 명의 역할을 소화했다. 그는 “<그 여자 억척어멈>을 할 땐 혼자 춤도 추고 노래하고 무용도 하고…온몸이 아파 너무 힘들었는데 ‘알란’을 해보니 맥을 끌고 가는 연기를 많이 한 것이 도움이 되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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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판에서 여자 배우의 역할에 대해 고민을 해온 것도 “모험”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줬다. 연극계는 원래 여자 배우의 존재감이 더 큰 시장이었다. 박정자·김성녀 등 굵직한 배우 중에 여자가 많다. 하지만 배역의 한계는 있었다. “20대 중반부터 그런 고민을 해왔어요. 연극계나 뮤지컬계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기가 쉽지 않죠. 나이 들수록 개성 강한 조연 내지는 조력자 역할을 해야 하고.” 그래서 그는 성별을 허무는 시도가 쭉 이어지려면 “‘남자와 여자 둘을 놓고 봐도 막상막하인데?’ 할 만큼 능력치를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관객 파워 때문에 제작자들이 남자 배우를 많이 쓰는 걸 바꿀 뾰족한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여자라서 뭘 극복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진짜 배우가 되려면 뭘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성별을 허무는 시도가 자칫 여자 배우에게만 특별한 기회를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경계했다. 어떤 역할을 두고 남녀 통틀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을 캐스팅하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파우스트> 이성열 예술감독도 김성녀를 캐스팅한 데 대해 “파우스트를 경지에 오른 지식인, 평범하지 않은 인간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남녀를 떠나서 이런 복합적인 인물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누굴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배해선도 그래서 ‘젠더 프리’라는 단어가 달갑지만은 않다고 했다. “유행처럼 번지다 금세 꺼질까 봐서요. ‘우리가 이런 걸 해봤어요’라는 느낌으로 올려지면 안 될 것 같아요.”
배해선표 알란이 등장한 덕분에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많은 여자 후배가 “알란 역을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후배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이 가장 기쁘다”며 “어떤 배우가 전례를 남겨 그게 역사로 쭉 내려오는 것도 좋지만, 한편으론 어떤 배우가 가능성을 열어 점점 많은 사람의 의식을 바꾸는 것도 좋지 않겠냐”고 말했다. 알란처럼 100살이 돼 돌아보면 이 순간도 연극계에 큰 발자국 하나를 남기는 순간이 아닐까.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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