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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30 09:42 수정 : 2019.12.31 02:43

금영측우기 실물(왼쪽)과 바닥면 담당 관리들의 직명을 새긴 부분.

문화재청, 금영측우기·창덕궁측우대·대구 선화당측우대 국보 지정예고

금영측우기 실물(왼쪽)과 바닥면 담당 관리들의 직명을 새긴 부분.

근대 이전 빗물이 내린 강수량을 쟀던 측정 기구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물로 잘 알려진 ‘금영 측우기’(보물)와 조선시대 측우(測雨) 제도가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옛 시설인 ‘창덕궁 측우대’, ‘대구 선화당 측우대’(이상 보물)가 국보가 된다.

문화재청은 금영 측우기와 창덕궁, 대구 선화당의 측우대를 국보로 지정예고하고, 원래 소재의 정확한 표기를 위해 각각의 명칭도 ‘공주감영 측우기’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대구감영 측우대’로 바꾸는 변경안을 함께 예고했다고 30일 밝혔다.

조선 시대 측우기와 측우대는 빗물의 양을 기록해 농사일에 대비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였다. 가뭄과 홍수 대비를 위해 측우기로 측정하고 고을 수령이 내린 빗물의 양을 왕실에 보고토록 한 측우 제도 또한 세계 과학사와 농업사에서 비슷한 유례를 찾기 힘든 이땅 특유의 전통이었다.

국보로 지정예고된 3점의 측우기와 측우대는 1442년(세종 24년) 조선에서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이래 그 제작 활용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왔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앞서 측우기는 1971년, 측우대는 1985년에 국가 보물로 지정됐었다. 측우기의 경우 48년 만에 국보로서의 가치를 재평가받은 셈이다.

금영 측우기는 조선 시대 충남 지역 감독관청이었던 공주감영(금영)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3년(1441년)조 8월18일치를 보면, 기상관측기관 서운관에 대(臺)를 세워 빗물을 받고 강우량을 측정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듬해 5월 측정 방식이 미진해 다시 원칙을 세웠는데, 이때의 원칙을 살려 19세기 초 만든 것이 바로 금영 측우기다.

금영 측우기의 제작 시기와 크기 등은 중단의 바깥 면에 새겨진 명문으로 확인된다. 명문을 보면, 측우기는 1837년(헌종 3년)에 만들어졌다. 높이는 1자(尺) 5치(寸), 지름 7치, 무게 11근이다. 오늘날 쓰는 치수로 바꾸면 높이 31.9㎝, 지름 14.9㎝, 무게는 6.2㎏에 해당한다. 세종 대에 처음 만든 측우기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바닥면 명문에는 ‘통인(通引)’, ‘급창(及唱)’, ‘사령(使令)’ 등 담당관리 직책명이 새겨졌다. 이런 명문들은 15세기 세종 대 확립된 강우량 측정제도가 19세기까지 이어져 원칙에 맞게 유지되었음을 일러준다.

형체 또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상·중·하단 모두 3개의 금속기로 이뤄졌다. 운반이 쉽도록 상부가 미세하게 넓고 하부를 좁게 다듬어 서로 끼워 맞출 수 있도록 해놓았다. 접합부는 대나무 마디처럼 만들어 기기의 뒤틀어짐을 막고자 했다.

금영 측우기는 한일병합 직후인 1915년께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1859~1918)가 일본으로 가져갔다가 1971년 환수되어 서울 기상청이 보관해 왔다. 조선 시대에는 중앙 조정에서 측우기를 제작해 전국의 감영에 보냈으므로 여러 점이 만들어졌으리라 추정된다. 하지만 현재는 금영 측우기만 실물로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측소장을 지낸 와다 유지의 기록을 보면, 1915년께 당시만 해도 국내에 알려진 측우기는 모두 5기, 측우대는 10기에 달했다고 한다. 1911년 서구 학술지 <네이처>에 세계 유일의 측우기로 처음 보고되면서 세계 기상학계에 존재가 알려졌으며, 동시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유일하고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서양의 경우 1662년 영국의 건축가이자 천문학자인 크리스토퍼 렌(1632~1723)이 처음 빗물의 양을 재는 우량계를 고안했으나, 조선 측우기보다는 220년 늦었다.

창덕궁 측우대는 1782년(정조 6년)에 만든 것으로, 측우대 제도가 정조 연간(1776~1800)에도 이어졌음을 알려준다. 함께 있었던 측우기는 전해지지 않지만 명문과 창덕궁 전경도인 <동궐도>를 통해 창덕궁 이문원(d[文院: 왕실문헌을 보관한 규장각의 딸림 전각) 앞에 놓였던 사실이 확인된다. 특히 정면에 들어간 긴 명문은 조선 전기 시작된 국내 측우기 제도의 역사와 실체를 보여주는 핵심 기록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측우기를 1442년(세종 24년)에 구리로 주조했다는 사실을 비롯해 1770년(영조 46년)에 세종 때의 제도를 따라 다시 측우기를 만들어 창덕궁·경희궁·팔도(八道)·강화부·개성부에 두었으며, 1782년(정조 6년) 정조의 명으로 이문원 뜰에 측우기를 설치했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대구 선화당 측우대

대구 선화당 측우대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전후면에 ‘측우대(測雨臺)’란 명칭과 ‘건륭 경인년(1770년) 5월’이란 제작시기가 새겨져 있어 1770년(영조 46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크기는 상면 길이와 폭이 36.7×37.0㎝, 높이 46㎝다. 영조 재위기에 측우대 규격을 공식화했던 역사적 사실을 증명해주는 과학유산이다.

문화재청은 국보로 지정 예고한 금영 측우기와 측우대 2개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한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보로 확정할 예정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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